화성(華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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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에 정조가 생부인 사도세자의 무덤을 수원으로 옮기면서 그 묘소의 보호와 자신의 왕권 강화를 위한 방안으로 새로 조성한 성벽 도시.

개설

화성(華城)은 정조가 지시하여 수원의 읍지에 1794년(정조 18) 2월 28일부터 착공하여 1796년 9월 10일에 완공한 성이다. 조선후기의 군사 전술과 건축 기술의 총예를 집적한 성곽 도시이며, 공격 능력을 겸비한 당대 최고의 성이다. 수원에 이런 성곽이 조성된 배경에는 정조의 정치적 의도가 있다.

1789년(정조 13) 7월에 정조는 생부(生父)인 사도세자의 무덤인 영우원(永祐園)을 수원으로 천장(遷葬)하겠다고 결정하였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무덤을 수원으로 옮기면서 그 묘소를 현륭원(顯隆園)이라고 추숭(追崇)하였다. 정조는 당시까지 사친(私親)인 생부의 지위가 미천한 것을 고려하여 왕릉에 버금가는 능역을 조성하였다. 이를 통해 자신의 왕권을 정당화하고 강화하는 동시에 생부의 정치적 위상을 높이고자 하였다. 이를 위한 정책의 하나로 화성을 기획하였다.

화성은 조선시대 성곽 축성법에서 벗어난 파격적인 방식으로 축조하였다. 화강암으로 성을 쌓던 방식을 버리고 벽돌로 축성하였으며, 축성법에서도 정약용이 고안한 거중기 등 새로운 기계와 기술을 대거 이용하였다. 동시에 수원과 인근 지역민을 대량으로 고용하여 임금 노동 형식으로 인원을 운영하면서 지역 경제의 활성화까지 꾀한 다방면의 변화를 가져오기도 하였다.

정조는 화성을 축조하기 이전에 행정적, 군사적 정책을 우선적으로 추진하였다. 먼저 1793년(정조 17)에 정조는 수원부(水原府)의 호칭을 화성으로 바꾸고 어필(御筆)로 현판을 써서 장남헌(壯南軒)에 걸었다. 또한 부사(府使)를 유수(留守)로 승격시켜 장용외사(壯勇外使)와 행궁정리사(行宮整理使)를 겸임하게 하고, 판관(判官) 1명을 두어 보좌하게 하였다. 장용영(壯勇營) 병방(兵房)을 고쳐 장용사(壯勇使)라 하고, 도제거(都提擧)를 두어 호위대장(扈衛大將)의 관청을 합해서 그를 소속시켰다(『정조실록』 17년 1월 12일). 유수부는 수도권을 종심적(從心的)으로 방어 체제를 구축한 행정구역이었다. 유수부에는 개성, 광주, 수원, 강화의 4개 지역이 포함되었다. 화성유수부가 된 지 1년 만에 정조가 친림하여 화성 축성을 기획하였다. 당시 화성에 행행한 정조는 현륭원이 있는 곳은 화산(花山)이고 요(堯) 임금의 고사와 관련하여 화(花) 자와 화(華) 자는 통용된다며 화성이라고 명명한 것이 옳다고 하였다(『정조실록』 18년 1월 15일).

정조 이후에도 역대 국왕은 화성에 행행하여 정조와 장조의 능침에 제사를 지냈으며 화성의 행궁과 지위도 유지하였다. 1895년(고종 32)에 지방 관제 개편 과정에서 화성은 다시 수원군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위치 및 용도

경기도한강 이남의 수원에 위치한다. 정조가 순조에게 보위를 물려준 후 상왕(上王)으로 있으면서 거처할 행궁의 외곽 방어를 위해 축성했다고도 한다. 사도세자의 영우원을 화성의 현륭원으로 천장하고, 도성에서 이곳으로 원행(園幸)한 이후 잠시 휴식을 취하고 제사를 지내기 전에 준비하는 공간으로 주로 활용하였다. 한강 이남에 위치하였으므로 한강을 건너기 위해 배다리인 주교(舟橋)를 임시로 건설해서 이용하였다. 정조 이후에도 왕들은 화성 행궁에 행행한 후 정조가 거행했던 것처럼 군사훈련, 과거시험, 지역 주민의 소원 수리 등을 하였으며, 현륭원 배알을 위해 경숙(經宿)하는 행궁 장소로 많이 이용하였다.

변천 및 현황

1895년(고종 32)의 갑오개혁 때 수원군으로 행정제도가 개편되었다. 1910년(순종 3) 이후 일제강점기에는 화성의 행궁이 훼철되어 행궁의 기능을 상실하였다. 돈대(墩臺) 등의 성벽들도 수리하지 않고 방치하여 훼손되었으며, 한국전쟁기에는 장안문 등이 폭격으로 크게 파손되었다. 1970년대에 복원하였다. 1997년에 수원 화성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되어 본격적인 복원 사업을 진행하고 있으며, 한국의 대표적인 성곽 도시가 되었다.

형태

성벽은 지형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5미터 전후이고 성벽 위에는 1미터 정도 높이의 여장(女墻)을 두었다. 성벽은 위로 올라가면서 안쪽으로 들어가는 규형(圭形) 쌓기를 기본으로 했다. 4개의 성문과 암문(暗門) 5개를 설치하였다. 성벽으로 둘러싸인 중앙에는 행궁을 두었다. 남문이 팔달문(八達門), 북문이 장안문(長安門), 동문이 창룡문(蒼龍門), 서문이 화서문(華西門)이다. 그 밖에 수문(水門), 적대(敵臺), 노대(弩臺), 공심돈(空心墩), 봉돈(烽墩), 치성(雉城), 포루(砲壘), 장대(將臺), 각루(角樓), 포사(鋪舍) 등의 시설이 있다. 특히 공심돈은 조선 정조대에 화성에 처음 도입한 성제(城制)였다. 다만 화성 성곽 주변에 해자(垓字)가 없다는 점은 의문이다.

관련사건 및 일화

1797년(정조 21)에 정조가 화성의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에서 화살 삼순(三巡)을 쏘아 모두 맞혔다. 각신(閣臣)과 장신(將臣)들은 물론 구경하던 백성 중에서도 활을 잘 쏘는 자를 뽑아서 시험하게 한 다음 1등에게 바로 전시(殿試)를 볼 수 있는 자격을 주었다. 또한 그날 밤에는 장대(將臺)에 올라 연거(演炬)를 실시했는데 신포(信炮) 3발을 터뜨리고 횃불 3개를 붙여서 올리자 모든 성가퀴에서 일제히 횃불을 올리는 등 일사불란한 모습을 보였다. 왕에서부터 백성에 이르기까지 군민(君民)이 일치되는 모습이었다(『정조실록』 21년 1월 29일).

정조가 화성에 남긴 치적은 후대의 국왕에 의해 계승되었다. 순조는 1800년(순조 즉위)에 화성의 지지대(遲遲臺)에 정조의 사적(事蹟)을 기록한 비석을 세우게 했다. 이곳이 정조가 원행할 때 늘 잠시 멈추던 곳[駐蹕]이기 때문이었다(『순조실록』 즉위년 11월 13일). 또한 정조의 어진(御眞) 1본(本)을 화성 행궁에 봉안하도록 하였다(『순조실록』 즉위년 12월 6일). 1801년(순조 1)에는 화성을 축성한 전후의 과정을 기록한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 9편을 간행하여 반포하였다(『순조실록』 1년 9월 18일).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일성록(日省錄)』
  • 『장용영고사(壯勇營古事)』
  • 『장용영절목(壯勇營節目)』
  •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
  • 김문식, 『정조의 제왕학』, 태학사, 2007.
  • 정해득, 『정조시대 현륭원 조성과 수원』, 신구문화사, 2009.
  • 김성윤, 「조선후기 정조대의 수원육성과 천도시도」, 『부대사학』20,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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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영구, 「정조대 오위체제 복구 시도와 화성방어체제의 개편」, 『진단학보』93,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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