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장대(西將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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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수원시팔달산 정상에 있는 장대(將臺).

개설

장대는 지휘하는 사람이 올라서서 명령하는 대를 가리킨다. 서장대(西將臺)는 성안이 한눈에 들어올 뿐 아니라 멀리 남쪽과 북쪽 들판이 다 보이는 팔달산의 정상에 자리하고 있는 2층 누각이다.

위치 및 용도

경기도 수원시팔달산 정상에 있는 서장대는 성의 안팎이 모두 한눈에 들어와, 화성 성곽 일대는 물론 이 산을 둘러싸고 있는 백 리 안쪽의 모든 동정을 파악할 수 있으며, 쇠뇌를 장치하는 노대(弩臺)는 팔방으로 쇠뇌를 발사하도록 되어 있었다.

변천 및 현황

1794년(정조 18) 8월 11일 터 닦기 공사에 착수하였고, 9월 16일에 상량하고, 9월 29일에 완공하였다. 서장대에서는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의 회갑연을 치른 을묘년 행차 때 장대한 군사 사열식인 성조식(城操式)을 치렀으며, 이를 기념해서 친필로 ‘화성장대(華城將臺)’라는 현판을 썼다. 『화성성역의궤』에는 “문지방 위에 임금께서 쓰신 큰 글자 ‘화성장대’로 편액을 붙였다.”라고 하였다. 이 현판은 20세기 초에 사라져버렸고, 지금의 현판은 1971년에 건물을 새로 고쳐 세우면서 새로 달아놓은 것이다. 상량문은 당시 우의정으로 있던 채제공(蔡濟恭)이 썼다.

서장대에서의 군사지휘는 왕이 직접 행하였는데, 그 절차와 훈련 내용은 따로 규칙으로 정해져서 함부로 바꿀 수 없도록 하였다. 『화성성역의궤』「의주(儀註)」편에 “임금께서 친히 참가하는 서장대의 군사 훈련 의식”이라는 항목이 마련되어 있다. 그 내용을 보면, 정해진 규칙에 따라 군사들이 각종 무기와 신호용 깃발이나 포를 갖추고 성곽 곳곳에 늘어서 있고, 서장대 주변에는 지휘관들이 둘러선 가운데 왕이 서장대에서 직접 군사 훈련을 이끌도록 되어 있다. 정조의 명령이 하나씩 떨어질 때마다 우렁찬 나팔소리와 함께 서장대에서 깃발이 올라갔으며, 이를 본 사방의 성문에서는 화포로써 응대하고 깃발을 흔들었다. 이것은 실제 전투가 벌어졌을 때를 상정해서 짠 치밀한 군사 훈련 의식이었다.

형태

2층의 누각으로 남한산성의 수어장대(守禦將臺)와 같이 아래층을 개방하고 한가운데에 장수가 머물 수 있는 마루를 두었다. 위층은 사방에 교창(交窓)을 내고 판자를 깔아 바닥을 만들었는데 이는 군사가 올라가서 주변을 살펴볼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그 모습이 아래층은 사방이 각기 3칸이고 위층은 사방 1칸에 불과하여 위층이 아래층에 비해 갑자기 좁아진다. 이것은 위층에 여러 군사들이 올라가 있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으로 화성뿐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이와 유사한 형태로 지어졌다.

화성장대는 1794년(정조 18) 수원성 축조 당시에 세운 2층 누각이며, 뒤에는 노대, 옆에는 군무소(軍務所)가 있었다. 누각의 아래층은 9칸에 연엽형(蓮葉形) 난간을 둘렀으며, 뒤쪽에는 분합을 설치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분합은 복원 시 설치하지 않았다. 바깥에는 둥근 기둥 열둘을 세웠는데 이것을 여덟모의 화강석 주초로 받쳤다. 위층은 사면에 교창을 내고 판자를 깔았다. 그 서북 모퉁이에 층사다리를 세워서 위층으로 통하게 하였으며 옥상의 한가운데 절병통을 세웠다. 후당인 군무소 건물은 서쪽 2칸은 온돌이고, 동쪽 1칸은 판자를 깔았었다. 서장대 복원 시에 군무소를 복원하지 않았다.

참고문헌

  •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
  •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
  • 김동욱, 『실학정신으로 세운 조선의 신도시 수원화성』, 돌베개, 2002.
  • 최홍규, 『정조의 화성 건설』, 일지사, 2001.
  • 한국문화유산답사회, 『경기남부와 남한강, 답사여행의 길잡이 7』, 돌베개,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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