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복산성(洪福山城)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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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홍복산성 |
한글표제 | 홍복산성 |
한자표제 | 洪福山城 |
관련어 | 북한산성(北漢山城) |
분야 | 정치/군사·국방/방어시설 |
유형 | 건축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후기 |
왕대 | 조선후기 |
집필자 | 노영구 |
장소 | 양주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홍복산성(洪福山城)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세종실록』 30년 12월 10일, 『숙종실록』 29년 3월 30일, 『숙종실록』 29년 4월 5일, 『숙종실록』 36년 10월 14일, 『숙종실록』 36년 10월 13일, 『숙종실록』 37년 2월 10일 |
조선 숙종대에 도성 방어체제 강화를 위해 경기도 양주의 홍복산에 축조하고자 한 산성.
개설
17세기 숙종대 들어 도성 수축론과 함께 도성 방어의 중요성이 부상하면서 도성 주변의 요충지에 산성을 축조하여 방어를 강화하자는 논의가 일었다. 먼저 신완(申琓)이 창의문 밖의 탕춘대 터 일대에 북한산성을 축성하여 비상시에 대비하자는 의견을 내자, 이인엽(李寅燁)이 그보다는 경기도 양주의 홍복산이 보다 적합하다는 의견을 내면서 홍복산성 축조에 대한 논의가 나타났다. 하지만 몇 차례의 논의 끝에 홍복산성보다는 북한산성 축조가 보다 용이하고 유용하다는 이유로 홍복산성 축조는 실행되지 못하고 논의로 그쳤다.
위치 및 용도
양주의 홍복산은 양주 읍치로부터 서남쪽 10리(약 4㎞)에 있는 산으로서 이 지역은 산세가 좋아 조선초기 국왕의 사냥 훈련터인 강무장(講武場)의 대상으로 선정되기도 하였다(『세종실록』 30년 12월 10일). 양주는 임진강을 건너 적성(積城)을 지나 한성으로 들어오는 북방의 요충으로서 주변에 산악 지대가 대로를 따라 이어져 있어 방어에 용이한 곳이었다. 주변에 대모산성(大母山城) 등 삼국시대부터 중요한 성곽이 산재해 있다. 조선후기 도성 방어론이 등장하면서 임진강과 도성 사이의 방어 거점으로서 양주 일대에 대한 방어의 중요성이 증대되었고 홍복산 일대에 대한 축성 논의는 그 연장선상이었다.
변천 및 현황
1702년(숙종 28) 신완의 북한산성 축조에 대해 여러 이견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1703년(숙종 29) 3월 판부사서문중(徐文重)은 북한산성 축조를 졸속으로 결정한 것에 대해 반대하고 아울러 북한산의 형세가 성 밖보다 성안이 더 험하고 산세에 가려짐으로 인해 명령이 전달되지 못하는 문제 등이 있어 방어에 불리하다는 의견을 내고 북한산성 축조 결정에 이의를 제기하였다(『숙종실록』 29년 3월 30일). 얼마 지나지 않아 사직이인엽은 북한산 대신 홍복산 일대에 산성을 축조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는 홍복산의 지세가 북한산에 비할 바가 아니고 육로로 연결되어 교통이 편할 뿐 아니라 남한산성과 기각지세(掎角之勢)를 이루는 요충이므로 홍복산성 축조를 주장하였다. 그리고 양주부의 관아를 이 산성으로 옮길 것을 아울러 주장하였다(『숙종실록』 29년 4월 5일). 여러 논의 후 북한산성을 도성 수축 후 축성할 것을 결정하였으나 여러 사정으로 인해 연기되었다. 1710년 서해안에 해적이 나타나 경계하라는 청나라 예부의 자문이 도착하자 다시 도성 방어론이 본격적으로 논의되었다. 이에 이이명은 홍복산성의 축성을 주장하는 등 북한산과 홍복산을 두고 축성 논의가 대대적으로 나타났다. 당시 이광적이나 조태로(趙泰老) 등은 이를 반대하고 도성 수비를 주장하기도 하였다(『숙종실록』 36년 10월 14일).
1710년 10월 훈련대장이기하는 홍복산과 북한산의 성터를 직접 조사한 후 북한산이 축성함에 편리하다고 건의하였다. 그는 홍복산의 지세는 안으로는 절험(絶險)의 형세가 있고 밖으로 둘러싸일 형세가 없으므로 성을 쌓는 데 적합하지만 사방 5리 안이 모두 흙산이므로 돌을 캐기 어려워 축성 작업의 공역이 어렵다고 보았다. 이에 비해 북한산은 인수봉과 백운대 등의 봉우리가 깎아지른 듯이 솟아 있어 방어에 유리하고 돌로 쌓은 옛 성터가 있고 주변에 석재가 풍부하여 축성하기 용이하다고 주장하였다(『숙종실록』 36년 10월 13일). 이에 따라 숙종은 1711년(숙종 37) 2월 북한산성 축조를 결정하고 민진후(閔鎭厚)를 북한산구관당상(北漢山句管堂上)으로 임명하고 무신인 김중기(金重器)에게 일을 함께 맡아 북한산성 축조를 책임지도록 하였다(『숙종실록』 37년 2월 10일). 북한산성은 그해 10월 25일 완공되어 도성 이외에 도성 수비를 위한 새로운 거점이 되었다.
참고문헌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경암집(絅菴集)』
- 『여지도서(輿地圖書)』
- 김용국, 「숙종조 북한축성고」, 『향토서울』8, 서울특별시, 1960.
- 이근호, 「숙종대 중앙군영의 변화와 수도방위체제의 성립」, 『조선후기의 수도방위체제』, 서울학연구소, 1998.
- 홍정덕, 「홍복산 축성 논의의 시말」, 『경기향토사학』10, 한국문화원연합회,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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