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을온(朱乙溫)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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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주을온 |
한글표제 | 주을온 |
한자표제 | 朱乙溫 |
동의어 | 줄온(乼溫), 주아온(朱兒溫) |
관련어 | 여진(女眞), 주을온리(朱乙溫里), 주을온원동(朱乙溫源洞), 주을온천(朱乙溫川) |
분야 | 정치/군사·국방/방어시설 |
유형 | 건축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조선 |
집필자 | 송양섭 |
장소 | 함경북도 경성(鏡城) 주을온사(朱乙溫社) |
규모(정면/측면/칸수) | 둘레 1,068척 혹은 1,227척, 높이 7~8척 |
양식 | 석축(石築)의 보성(堡城) |
관련 인물 | 남공철(南公轍), 김유연(金有淵)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주을온(朱乙溫)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태종실록』 13년 7월 9일, 『세종실록』 8년 1월 24일, 『세조실록』 6년 3월 1일, 『세조실록』 6년 3월 13일, 『세조실록』 7년 5월 8일, 『순조실록』 21년 1월 25일, 『고종실록』 14년 2월 25일, 『고종실록』 14년 7월 5일 |
조선시대 함경북도 경성부에 속한 보(堡).
개설
주을온보는 함경북도에서는 내지에 해당하는 경성에 속한다. 처음에는 경원(慶源)으로 이속되었으나 이후 다시 경성(鏡城)에 환속되었다. 처음에는 구자(口子)가 설치되어 권관(權管)을 두었으나 세조대에 여진족의 공격을 받은 뒤 보를 축조하고 병마만호(兵馬萬戶)가 절제하도록 했다. 주을온보는 1877년(고종 14)에 폐지되었다.
위치 및 용도
주을온보는 함경북도의 대도호부(大都護府)이자 병마절도사의 본영이 있는 경성부(鏡城府)의 속진으로 주을온사(朱乙溫社)에 위치한다. 인근에는 백두산에서 발원한 주을온천(朱乙溫川)이 경성과 길주(吉州) 사이를 지나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주을온보는 경성의 남쪽 32리(약 12.6㎞)에 있으며 병마만호가 관할하였다. 함경북도 이남의 3개 읍인 경성, 길주, 명천(明川)은 유사시 육진과는 별도로 삼위(三衛)로 분군(分軍)하는데, 길주가 중위(中衛), 명천이 우위(右衛), 부령(富寧)이 좌위(左衛)가 된다. 주을온보의 만호는 우위에 소속되어 후부장(後部將)이 된다. 함경북도와 함경남도를 통해서 강원도와 경기도로 이어지는 길목을 방어했다.
변천 및 현황
주을온은 어이관(於伊寬)·오촌(吾村)과 함께 원나라에서 길목으로 활용하던 원동(源洞)이었다. 조선 태종대에는 올량합(兀良哈) 여진이 드나들었기 때문에 경계의 대상이 되었다(『태종실록』 13년 7월 9일). 이에 대한 조선 조정의 구체적인 조처는 알 수 없으나, 구자를 설치했던 것으로 보이며 1426년(세종 8)에 일시적으로 경원에 속하게 되었다(『세종실록』 8년 1월 24일). 이후에 두만강 일대에 육진이 정비되면서 다시 경성에 속하게 되었다. 주을온은 육진에 비해 내지에 속한 지역이었으나 1460년(세조 6)에 여진족의 공격을 받았다(『세조실록』 6년 3월 1일). 이는 신숙주(申叔舟)가 북방을 정벌하는 구실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육진의 예에 따라 농보(農堡)를 축조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세조실록』 6년 3월 13일). 이듬해 5월에는 30리(약 11.8㎞)에 달하는 주을온과 경성 사이에 민가가 많다는 이유로 승격시켜 권관 대신 병마만호를 두게 된다(『세조실록』 7년 5월 8일).
1821년(순조 21) 우의정남공철(南公轍)은 변방 백성을 우대하는 차원에서 일부 자리를 현지 민으로 임명할 것을 요청했고, 이에 따라 주을온만호는 함경남도의 쌍청권관(雙靑權管)과 함께 자벽과(自辟窠)로 정해졌다(『순조실록』 21년 1월 25일). 주을온보는 1877년(고종 14) 북도안무사(北道安撫使) 김유연(金有淵)의 장계(狀啓)에 따라 어유간보(魚游澗堡)·오촌보(吾村堡)와 함께 철폐되었고, 소속 병력과 물자는 조산(造山)·아산(阿山)·안원(安原)·황척파(黃拓坡) 등 4개의 보로 이속되었다(『고종실록』 14년 2월 25일)(『고종실록』 14년 7월 5일).
형태
주을온보는 돌로 축조된 석보로서 둘레는 1,068척 혹은 1,227척 등으로 다르게 나타나며 높이는 7~8척이었다. 최근의 기록에 따르면 주을온부의 둘레는 323m, 높이는 2m 정도라고 한다. 방어 시설로는 여장(女墻) 88개, 옹성(甕城) 3개, 곡성(曲城) 1개가 있고, 동·남·북쪽에 각각 한 개씩의 문이 있으며, 보 안에 2개의 우물과 1개의 창고가 있다. 그 밖에 주을온보 서봉봉수(西峯烽燧)와 남봉봉수(南峯烽燧) 등 두 곳의 봉수가 설치되어 있었다.
관련사건 및 일화
1502년(연산군 8) 여진족이 주을온보 일대를 침범하여 노략질을 하였다. 이에 함경북도병마우후는 박충동(朴忠洞)을 통해서, 판관(判官)과 평사(評事)는 노야동(爐冶洞)을 통해서, 병마절도사는 곧장 주을온보로 진입해서 이들을 제압했다.
1587년(선조 20) 3월 여진족 40여 명이 입암(立巖)이라는 곳에서 조선 체탐군과 조우했고, 이에 주을온만호박유근이 토병들과 함께 전투를 벌여 이들을 격퇴했다. 그러나 병력이 적어 적을 끝까지 추격하지는 못했고, 경성의 정예병을 거느리고 출동한 판관김경로(金敬老)가 오촌보에 이르러 주저한 탓에 적을 차단하는 데 실패했다.
참고문헌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제승방략(制勝方略)』
- 『여지도서(輿地圖書)』
- 『만기요람(萬機要覽)』
- 안재홍 지음, 정민 옮김, 『(정민 교수가 풀어 읽은) 백두산 등척기』, 해냄,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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