읍청루(挹淸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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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한강용산 일대에 세운 정자.

개설

읍청루(挹淸樓)는 1777년(정조 1)에 도성 남서쪽의 대표적인 포구이자 관문이었던 마포나루 일대의 별영창(別營倉) 부근에 세운 정자이다. 별영창에 부속된 정자로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위치하였으며, 주로 한강을 조망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위치 및 용도

읍청루는 서울특별시 용산구 청암동의 강안(江岸)에 위치하였으며, 한강 일대의 경관을 감상하기 위해 왕족이나 사대부들이 여가를 즐기던 정자로 사용되었다. 별영을 세우고 거기에 읍청루를 지어 훈련도감의 군병들 급료를 지급하는 곳으로 이용하였다. 읍청루는 별영 창고에 딸린 누각으로 강가에 있어 수변경관이 수려한 명승으로 손꼽혔다. 정조대에는 왕이 거둥하여 수군 훈련을 열병(閱兵)하였다(『정조실록』 19년 3월 18일).

변천 및 현황

한강변 용산 강안 일대의 산턱 중에 돌출된 부분이 있는데, 이를 ‘용머리’ 또는 ‘부루배기’라 불렀다. 1596년(선조 29)에 용머리의 동남쪽, 원래 남호독서당(南湖讀書堂)이 있던 자리에 별영창을 세웠다. 이를 ‘벼랑창’이라고도 하였다.

별영창은 훈련도감 군인들의 급료와 마료(馬料)를 출납, 관리, 보관하는 군사용 창고였다. 거기에 읍청루를 지어 훈련도감 군병들의 급료를 지급하는 곳으로 이용하였다. 현재 서울특별시 마포구 도화동과 용산구 청암동 경계에 있었다.

1876년(고종 13) 개항 이후 용산강에 증기선이 나타나고 용산이 청나라와 일본 상인들의 주요 활동 무대가 되었을 때 읍청루에 세관을 설치하였다. 이후 총세무사였던 영국인 브라운(Brown)의 별장으로 쓰였다가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의 별장으로도 사용되었다. 현재는 모두 소실된 상태이다.

형태

건물의 형태는 정면 2칸, 측면 3칸으로 된 무실형 정자이다. 2층의 누각식 정자로 강가에 누상주와 누하주를 놓고 난간을 두른 팔작지붕 형태의 정자였다.

관련사건 및 일화

조선시대의 마포 일대에는 읍청루와 같은 정자가 많았다. 왕족이나 양반들이 여가를 보내는 곳이었는데 밤섬, 양화진, 절두산, 노들강변 등 한강 하구의 풍경이 빼어났다. 정조는 읍청루에 올라 “행화 핀 봄날 강물 앞에서 술맛 더욱 좋구나. 저기 저 많고 적은 배들 신선경 찾노라 저리 헤매나, 하루 종일 왔다 갔다 물가에 그대로 있네.”라고 시를 읊조렸다.

참고문헌

  •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考)』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한경지략(漢京識略)』
  •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한강사(漢江史)』,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1985.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