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광각(紫光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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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 중남해의 서쪽에 위치한 전각.

개설

명 정덕제가 활쏘기를 보기 위하여 이곳에 돈대를 짓고 평대(平臺)라고 하였다. 청의 건륭제는 이곳을 개보수하여 무진사(武進士)들의 무예 시험을 관전하기도 하고 장수들의 개선을 환영하는 연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또한 공신들을 위로하는 장소로 쓰이면서 공신전이라고도 하였다. 공신 이외에도 공주의 종실, 외번의 사절들을 접대하는 장소로 쓰였다.

위치 및 용도

자광각은 북경 중남해에 서안에 위치한다. 전각 앞에서 무진사들이 말을 타고 활 쏘는 시험을 보기도 하였다. 공신·공주의·종실 및 외번의 사절들을 맞이하는 연회가 자광각 뒤의 무성전(武成殿)에서 거행되었다. 동치 연간(1861∼1874년) 청 정부는 이곳에서 처음으로 외국 사신들을 공식적으로 접견하였다. 『정조실록』에는 자광각이 자주 언급되는데, 주로 조선의 사신들이 자광각의 연회에 참여하고 보고 겪은 연회의 절차에 대한 것이었다(『정조실록』 7년 2월 27일). 당시 청 황제가 몽골·티베트 등 외번(外蕃)을 대상으로 베푼 연회 중 하나인 세초연(歲初宴)이 이곳 자광각에서 열렸다(『정조실록』 17년 2월 22일).

변천 및 현황

자광각의 전신은 평대로 명대에 처음 건설되었다. 정덕제가 돈대를 쌓아 기마와 활쏘기를 열람하여 평대라 칭하였다. 뒤에 돈대를 없애고 자광각을 건설하였다. 1760년 당시 공신도(功臣圖)에 황제가 지은 시를 새겨 전각 안에 두었고 1775년 중건한 뒤인 1776년에는 회랑 안에 건륭제가 이리(伊犁)·회부(回部) 및 사천 서북부 지역을 평정한 그림을 그렸다.

형태

자광각은 1761년 중수되면서 황유리기와에 5개의 용마루를 얹는 방전정(龐殿頂)의 규제를 갖추었고 상하 2층의 형태가 되었다. 또한 후전으로 팔작지붕의 무성전(武成殿)도 건설되었다. 양측에는 회랑을 설치하고 1층의 전면은 비바람을 막도록 설계되었다.

    1. 00015701_그림1_자광각 앞에서 황제의 입장 전 도열한 문무관원 및 몽골 왕공귀족 (『평정서역전도(平定西域戰圖)』북경 국립고궁박물원)
    1. 00015701_그림2_황제가 연회를 베푸는 장면 (「자광각사연도(紫光閣賜宴圖)」, 북경 국립고궁박물원)

참고문헌

  • 鄭天挺·吳澤·楊志玖 主編, 『中國歷史大辭典』, 上海辭書出版社, 2000.
  • 聶崇正, 「淸朝宮廷銅版畫 『乾隆平定准部回部戰圖』」, 『故宮博物院院刊』, 故宮博物院, 1989.
  • 張小銳, 「紫光閣改建與陳設收藏」, 『中國紫禁城學會論文集(第五輯下)』 紫禁城出版社,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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