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가(弓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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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곽에 성가퀴와 함께 설치된 구조물로 평상시에는 군기를 보관하고 순찰하는 군인이 쉬는 장소로 전시에는 활을 쏘는 방어 시설.

개설

성곽에는 다양한 상황에 대응하기 위한 시설물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 가운데에는 유사시 사용해야 할 물품을 보관하는 장소가 필요했다. 이러한 시설물은 전시에는 성을 지키는 군사가 몸을 숨기고 적을 공격할 수 있는 구조로 만들어졌고, 평소에는 성곽을 점검하거나 순찰을 행하는 장졸(將卒)이 머무는 장소가 되었다. 특히 궁가(弓家)는 화살과 같은 무기를 보관하기도 하고 전시에는 적에게 활을 쏠 수 있도록 고안된 시설물이다.

위치 및 용도

궁가는 성곽의 중심을 이루는 성곽의 몸체인 체성(體城) 위에 설치되었다. 궁가를 설치하는 목적은 대체로 세 가지였다. 궁가는 이름 그대로 ‘활집’이라는 의미로 전시에 활을 쏘는 장소로 사용하는 것이 가장 큰 설치 목적이었다. 또 성곽의 특성상 군기를 한곳에 모아둘 경우 전시에 분급하기 어려웠던 까닭에 화살이나 돌과 같은 무기류를 평소부터 보관하는 창고 역할도 하였다. 마지막으로 성곽의 시설물을 확인하고 순찰하는 군인들이 추위나 더위를 피해 휴식하는 초소의 역할도 했다.

궁가는 적을 방어하는 시설로서의 기능만을 가지고 있던 성가퀴보다는 용도가 많은 구조물이었다. 특히 무기 등을 쌓아두는 창고의 역할을 했다는 점은 주목된다. 세종대에는 연기를 올려 여러 신호를 전달하던 연대(烟臺) 위에 축조하여 무기를 두고 그 안에서 적을 정탐하게 하였다. 또 평산의 읍성과 산성 축조 논의에서는 궁가를 수선하여 창고를 그 안에 두라고 하고 있어 그 기능을 잘 보여준다(『세종실록』 4년 8월 19일) (『세종실록』 21년 10월 18일).

변천 및 현황

궁가는 성곽을 방어하는 시설물이지만, 사료에 자주 등장하지는 않는다. 특히 여러 성곽의 시설물을 나열하는 경우에도 궁가의 존재가 확인되는 예는 드물다. 그러나 으레 성곽 축조 시 포함되는 구조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491년(성종 22) 고산리진(高山里鎭)에서 벌어진 여진과의 전투에서 궁가를 활용하여 적을 방어하였음이 확인된다. 고산리는 본래 구자(口子)라고 불리는 방어시설이었고, 1482년(성종 13)에 이르러서야 성을 쌓았다(『성종실록』 13년 9월 30일). 이때의 축성 기사에는 궁가 등의 시설물 현황은 전혀 나타나지 않고 있는데 이는 그것이 특수한 형태가 아닌 보편적인 시설물이었음을 반증한다. 방어시설물로서 궁가의 기본적인 설치 목적은 총과 활을 쏠 수 있는 구멍을 갖춘 조선후기의 성첩(城堞), 즉 성가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태조대에 축조한 의주성에는 궁가와 단장(短墻)을 함께 설치한 사례가 확인된다(『태종실록』 10년 3월 30일). 단장은 곧 여장(女墻)을 의미하는데 당시에는 조선후기의 성첩과 같은 형태가 아니라 낮은 담장이었다. 즉, 체성 위에 낮은 담을 쌓아 병력을 보호하고 전투 시에는 군사들이 궁가에 들어가 적과 교전했던 것이다. 세종대에 평안도 여연부의 상무로(上無路)에 설치한 석성에는 207개의 궁가가 있었고 문종대에는 전라도 흥덕현(興德縣) 읍성의 궁가 330여 개가 확인된다. 이때 여장이 설치되어 있었지만, 대체로 약 6자(약 1.8m) 간격으로 궁가가 두어졌으므로 궁가는 성첩을 대신하는 기능을 가진 방어시설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세종실록』 21년 윤2월 7일)(『문종실록』 1년 8월 21일).

성첩의 제도가 어느 시점에 변화했는지는 분명히 알 수 없으나, 임진왜란 당시에는 도성(都城)에 3만 개가 확인된다. 궁가의 수는 7,200여 개에 달하며 대략 4개의 성첩마다 1개소가 설치되었음을 보여준다(『선조수정실록』 25년 4월 14일).

임진왜란 이후, 일본과 중국의 영향으로 성곽 축조 양식에 많은 변화가 생긴 이후에는 궁가의 기록이 매우 드문데 이는 활 중심에서 총포 등 화기로 신무기 사용이 확대되는 전술적 변화에 따른 것이었다. 점차 성첩의 기능이 강조되고 궁가는 대체로 필요성이 감소했던 것이다. 또 성안에 창고 시설들이 확충되면서 체성 위에 설치된 궁가는 점차 그 모습을 감추게 된다. 다만 1596년(선조 29)에는 도성에 포를 쏠 수 있는 포루와 낮은 담장인 치첩(雉堞), 궁가를 함께 설치하라는 지시가 내려지고 있어 한동안 제도적인 과도기를 거쳤음을 알 수 있다(『선조실록』 29년 12월 2일).

형태

궁가에 대한 기록은 산발적으로 나타나고, 전술적인 논의가 나오지 않으므로 그 구체적인 형태는 확인할 수 없다. 다만, 1572년(선조 5) 중국 북경을 방문했던 허진동(許震童)이 남긴 『조천록(朝天錄)』에서 확인되는 중국의 궁가를 통해 그 형태를 짐작해볼 수 있다.

허진동이 산해관(山海關)에 이르렀을 때 명군에게 성을 지키는 방법에 대해 질문하니 그들은 궁가에는 5명이 지킨다고 답하였다. 또 허진동이 본 바에 따르면 성 위의 궁가는 석회를 발랐는데 높이가 7~8자(약 2~2.4m)에 이르고 각 궁가의 사이에는 서너 곳에 돌을 쌓아두는 한편으로 큰 횃불 7개를 두어 변란이 일어나면 불을 붙인다고 하였다. 조선의 궁가도 이러한 중국의 제도와 유사했을 것으로 보인다. 즉, 궁가에는 여러 명의 인물을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였고, 무기 등 성을 지키는 데 필요한 도구를 모아두는 창고의 역할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대체로 궁가는 성 수비를 담당하는 수성군(守城軍)의 근무지이자, 적을 관측하는 관측지로 역할을 했고 또 무기나 군량을 쌓아두는 창고를 겸하는 일종의 가옥(家屋) 형태였던 것이다.

관련사건 및 일화

1491년(성종 22) 평안도에서 여진족과의 군사적 충돌이 벌어졌다. 조선에서는 평안도도원수(平安道都元帥)이극균(李克均)으로 하여금 사태를 주관하도록 했다. 이해에 수차례의 국지적 전투가 벌어졌고 여진족이 조선의 진보(鎭堡)를 공격하였다가 격퇴되는 국면도 전개되었다. 이해 8월 21일 여진 기병 2백여 명이 강계부의 고산리진을 공격했다가 패하였다. 당시 이극균은 여러 진에 ‘적이 이르면 성안에 사람이 없는 것처럼 하고 형편에 따라 처리할 것’을 지시한 바 있었다. 이에 따라 고산리첨사(高山里僉使)강지(姜漬)는 성 위의 궁가마다 각각 궁수(弓手)와 방패를 든 군사, 장창을 가진 군사 각각 1명씩 총 3명을 배치하여 대기하게 하였다(『성종실록』 22년 8월 29일). 이때 성 남쪽의 궁가를 지키던 군사들이 성을 오르는 적을 향해 활을 쏘며 교전한 사실이 확인된다(『성종실록』 22년 9월 4일). 결국 여진의 기병은 고산리진을 함락하지 못하고 물러나 추격하는 조선군에 의해 큰 타격을 입게 된다. 이 사례는 궁가를 수성전(守城戰)에서 활용하는 형태를 잘 보여주고 있다.

참고문헌

  • 『동상선생문집(東湘先生文集)』권(卷)7 「조천록(朝天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