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만관(龍灣館)

sillokwiki
Silman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12월 9일 (토) 22:53 판 (XML 가져오기)

(차이) ← 이전 판 | 최신판 (차이) | 다음 판 → (차이)
이동: 둘러보기, 검색



관리나 사신 등이 왕래하는 동안 머물러 쉬어 가거나 숙박 등의 용도로 사용되었던 의주의 객사.

개설

용만관은 조선과 중국 사이의 사행로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던 의주에 설치된 객사(客舍)였다. 따라서 용만관은 조선의 객관들 중에서 좀더 중요한 위치에 있었던 시설로 설명할 수 있다. 특히 임진왜란 당시에는 선조가 의주로 피난하였을 때, 용만관에서 국정을 처리하기도 하였다. 이에 따라 명나라 장수나 사신 등의 영접이나 대면 등의 중요한 업무들이 용만관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이후 청과의 개시무역(開市貿易)이 성행하게 되면서 용만관의 중요성은 더욱 확대되었다.

변천 및 현황

객사란 여러 군현(郡縣)이나 역참(驛站)에 설치하여 공무를 수행하는 관원이나 사신들의 왕래 과정에서 숙박 등의 다양한 편의를 제공하는 시설이었다. 이와 같은 기능을 수행하던 시설을 보통 ‘관(館)’이라 불렀다. 조선시대에는 역(驛)과 참(站)도 관으로 불렀다. 따라서 객사는 객관(客館)이라고도 불리었다. 하지만 조선시대 동안 ‘관(館)’이라 불리던 곳들은 거의 대부분 군현의 객사를 지칭하였다.

『고려사(高麗史)』충렬왕 5년(1279) 8월의 기록에 객관을 지었다는 기록이 처음으로 확인된다. 이 기록에만 근거한다면 객사는 고려후기에 와서야 설치되었던 것으로 설명될 위험성이 높다. 하지만 객사가 담당하던 기능과 역할 등을 생각해 볼 때, 고려초기부터 설치되어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특히 외국 사신이 국내에 파견되었을 때, 개경에 이르기 전에 머물렀던 기록이나 연회 등을 개최하였던 사실 등이 확인된다. 따라서 외국 사신들의 숙박과 연회 등이 객관에서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조선시대부터는 객사에 전패(殿牌)를 안치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왕이 있는 곳을 향하여 절을 올리는 향망궐배(向望闕拜)를 올리도록 규정하였다. 물론 조선시대에도 관리와 사신의 숙소와 편의 제공이라는 본연의 임무는 유지되었다. 특히 명과 청의 사신이나 조선의 사신들이 왕래하던 사행로 주변에는 객관을 사용하는 빈도가 높았다. 그렇기 때문에 건물 보수 등의 역사가 빈번하게 발생하였고, 이에 따른 주변 지역 백성들의 고충도 점차 증가하였다.

의주에 건립한 객관에 ‘용만관’이라는 명칭을 붙이게 된 경위는 현재로서는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렵다. 다만 고려시대에 의주를 용만현(龍灣縣)이라고 지칭하였기 때문에 여기서 파생한 명칭으로 추정될 뿐이다. 아울러 압록강이 용만이라 불린 사실도 의주의 객관 명칭이 용만관이 된 한 이유였을 것으로 보인다.

용만관은 1484년(성종 15)에 목사이강정(李康正)이 건립하였다. 1718년(숙종 44) 중문과 대문을 세웠다는 기록이 확인된다. 또한 1843년(헌종 9) 윤치정(尹致定)이 상칙방(上勅房)과 동대청(東大廳)을 증축하였다.

관련사건 및 일화

『조선왕조실록』에서 용만관에 관한 기록이 처음 확인되는 것은 선조대였다. 선조는 임진왜란 당시 명의 황제가 보낸 은 20,000냥을 참장(參將) 곽몽징(郭夢徵)이 가지고 오자, 직접 나가서 영접하고 용만관으로 와서 의례를 준행하였다(『선조실록』 25년 6월 24일).

선조는 또 임진왜란 발발 후 의주로 피난하였을 때 용만관에서 국정을 처리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선조가 명의 사신을 영접하거나 칙서 등을 받을 때, 혹은 명의 사신과 전쟁 상황이나 군사에 관련한 일 등을 논의할 때 용만관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았다.

선조는 명에서 칙사가 왔을 때, 성내에 위치해 있던 용만관에서 머물게 할 것인지, 성 밖에 있던 의순관(義順館)에서 머물게 할 것인지에 대해서 예조에 묻기도 하였다. 예조는 평소 칙사의 영접은 근정전(勤政殿)에서 하고 상·하마연(上下馬宴)은 태평관(太平館)에서 베풀어 왔다는 점을 근거로 들어 의순관에 머물게 해야 한다고 답하였다. 다만, 현재 다른 장수들이 이미 의순관에 머무르고 있어 칙사가 쉴 곳이 마땅치 아니하므로 이번에는 용만관에서 칙사를 영접하자고 하였다(『선조실록』 25년 9월 1일).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고려사(高麗史)』
  •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관서읍지(關西邑誌)』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