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구정(狎鷗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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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동호 지역에 조성되어 외국 사신들에게 유명했던 한명회의 정자.

개설

압구정(狎鷗亭)은 세조 때의 권신인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한명회(韓明澮)의 별장이었다. 한명회는 ‘세상일 다 버리고 강가에서 살며 갈매기와 노닌다.’는 뜻의 압구(狎鷗)를 호로 삼고, 풍광이 좋았던 동호 지역에 정자를 지어 은거하고자 했다. 한명회의 실제 생활과 다르게 부귀공명 다 버리고 강가에서 해오라기와 벗하여 지낸다는 뜻을 지니고 있어 이곳을 지나가는 문인과 유지들의 비웃음을 사기도 하였다. 압구라는 이름은 한명회의 부탁을 받은 명나라 사신 예겸(倪謙)이 구양수(歐陽脩)의 시 구절에서 본떠 지은 것이다.

한강 남쪽에 높게 솟아오른 언덕에 위치하여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경관을 조망할 수 있었기 때문에 중국 사신들은 이곳을 들르고픈 명소로 꼽았다. 오늘날 압구정동이란 행정명의 유래가 되었지만, 1960~1970년대 한강공유수면매립사업과 택지개발사업으로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되어 흔적조차 볼 수 없다.

위치 및 용도

오늘날 서울특별시 강남구 압구정동에 있었다. 두뭇개에서 강 건너편에 그리 큰 동산은 아니지만 강가 쪽으로 깎아지른 듯한 낭떠러지를 이룬 언덕이 있어서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말하자면 동호(東湖) 가에 있는 명소의 한 곳이었다. 한강물이 발 아래로 유유히 흐르고 강 건너 북쪽으로 도성의 여러 산과 저 멀리 북한산 연봉과 도봉산·수락산·암산이 바라보이고, 동남서쪽으로 강 건너 살곶이벌과 그 뒤의 아차산·남한산·청계산·관악산 등이 두루 보이는 뛰어난 터전이었다.

1484년(성종 15)에 한명회가 그의 나이 70세로 궤장(机杖)을 하사받고 물러나 압구정에서 여생을 보낼 때 성종이 친히 압구정시를 지어 내렸고, 조정의 여러 문사들도 어제(御製)에 화운(和韻)하여 수백 편의 시가 쓰였다고 전한다. 이 정자는 중국 사신을 접대하는 곳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는데, 압구정의 배 띄우기는 경도승경(京都勝景) 중의 하나였다.

변천 및 현황

1487년(성종 18)에 주인인 한명회가 죽은 이후에도 압구정은 계속 유지되면서 서울의 명사들과 풍류시인들이 찾아가서 시를 읊는 명소가 되었다. 선조대에는 중국 사신인 경리(經理)양호(楊鎬)가 허국위(許國威) 군병과 한강에서 배를 타고 술을 마시며 압구정 아래에 이르렀다는 기록이 있다(『선조실록』 31년 5월 28일). 이후 압구정은 조선말에 이르러 저자섬과 함께 철종의 부마인 금능위(錦陵尉) 박영효(朴泳孝)에게 하사되었다. 이후 고종대에도 윤경순(尹景純)이 압구정에서 사냥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고종실록』 22년 12월 23일).

정자가 아주 없어진 것은 그 이후의 일이다. 한강은 일제강점기와 근현대에 급격하게 변화하였고, 한강변에 위치했던 수많은 정자가 훼손되었다. 압구정이 있던 자리는 1960~1970년대에 한강공유수면매립사업과 택지개발사업으로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되었고, 오늘날에는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72동과 74동 사이에 압구정 터라는 표석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형태

정자의 모습은 겸재(謙齋) 정선(鄭敾)의 「압구정도(狎鷗亭圖)」를 통해 알 수 있다. 높은 언덕 위에 정자가 있는데, 마루 둘레에 난간을 돌리고 팔작지붕을 한 형태로 그려져 있어 소박한 일반적인 정자와 달리 비교적 규모도 크고 주위 경치와 어울려 화려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관련사건 및 일화

압구정의 풍광이 너무 아름다웠기에 중국 사신이 압구정을 보고 소문이 퍼져 계속해서 동호를 찾아오게 되어 폐단이 생길 것으로 걱정하였다. 이에 성종은 제천정과 희우정은 역사가 있어 폐하지 못하지만, 압구정은 폐해야 한다고 하였다(『성종실록』 12년 6월 25일). 이후 한명회는 중국 사신이 압구정에서 놀고자 한다 하여 장막을 칠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자 곧 아내가 앓는다고 거짓말을 하며 가지 않으려고 하여 괘씸죄로 파직되었다(『성종실록』 12년 6월 26일).

참고문헌

  • 김영상, 『서울육백년사』, 서울특별시 시사편찬위원회, 1996.
  • 김선화, 「조선시대 서울 한강 누정의 장소성에 관한 연구」, 상명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