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선당(協善堂)
주요 정보 | |
---|---|
대표표제 | 협선당 |
한글표제 | 협선당 |
한자표제 | 協善堂 |
상위어 | 경복궁(景福宮) |
관련어 | 사정전(思政殿) |
분야 | 왕실/왕실건축/궁궐건축물 |
유형 | 건축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조재모 |
장소 | 경복궁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협선당(協善堂)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고종실록』 30년 10월 24일 |
경복궁 편전인 사정전 서행각의 일부.
개설
경복궁 편전인 사정전(思政殿) 영역은 중앙의 사정전과 동서의 만춘전(萬春殿)·천추전(千秋殿)으로 구성되었으며, 이들 세 전각을 둘러싼 행각이 있다. 협선당(協善堂)은 서쪽 행각의 일부이다.
위치 및 용도
사정전 서행각은 모두 14칸인데, 가장 남쪽 칸과 북쪽 칸은 궐내 각사 및 경회루(慶會樓) 영역으로 나아가는 1칸의 문이 각각 설치되었고, 나머지 12칸 중 중앙부 1칸은 부엌이다. 부엌을 중심으로 남쪽 6칸이 용신당(用申堂), 북쪽 5칸이 협선당이다. 고종대에 왕자사부(王子師傅)와 상견례를 할 때에 강학청(講學廳)으로 쓴 것으로 보아, 사정전의 부수적 기능을 담당하였던 것으로 보인다(『고종실록』 30년 10월 24일).
변천 및 현황
조선전기의 사정전 주변은 고종대에 중건한 이후의 모습과 달랐다. 만춘전과 천추전이 행각 밖에 있었고, 행각 내에는 사정전만 독립적으로 놓였다. 이는 조선 개국 초기의 창건 당시 모습과도 다르다. 협선당은 조선전기의 기록에 등장하지 않아 임진왜란 이전의 존재 여부는 알 수 없으나, 1868년(고종 5)에 만든 것으로 『일성록(日省錄)』에 기록되었다.
당호는 왕과 신하가 서로 선(善)을 돕는다는 뜻을 취하였다. 1915년의 조선물산공진회 개최를 위해 경복궁 전각들이 철거될 때 사정전 서행각에서 용신당 일부와 숭현문 등이 사라졌다. 1993년에 행각 보수공사를 통해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형태
「북궐도형(北闕圖形)」과 현황을 살펴보면, 서행각의 북쪽 5칸인 협선당은 남쪽의 부엌과 북쪽의 문칸 사이에 조성되었다. 남쪽에서부터 1칸의 방, 2칸의 대청, 다시 2칸의 방이 연이어 배치되었다. 중앙부 부엌은 남북의 용신당과 협선당의 방에 난방할 수 있는 아궁이를 두었고, 북쪽 문칸에서 인접한 방의 아궁이를 해결하였다. 굴뚝은 서행각 서쪽 밖의 담장에 간이 굴뚝을 두어 처리하였다. 기단은 외벌대 장대석으로 하였고 약 1,120㎜를 내밀었다. 민흘림이 있는 사각형 기둥을 초석 위에 올리고 민도리식 구조를 사용하였다. 상부에는 4분변작한 5량가의 지붕을 얹었는데, 홑처마로 처리하였다.
참고문헌
- 『일성록(日省錄)』「경복궁배치도(景福宮配置圖)」「북궐도형(北闕圖形)」
- 문화재청, 『경복궁사정전일곽 정밀실측조사보고서』, 문화재청, 2014.
- 문화재청, 『궁궐현판의 이해』, 문화재청, 2006.
- 이철원, 『왕궁사』, 동국문화사, 1954.
- 조재모, 「조선시대 궁궐의 의례운영과 건축형식」,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3.
- 홍순민, 「조선왕조 궁궐 경영과 “양궐체제”의 변천」,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6.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