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루각(報漏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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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궁중 물시계인 자격루를 보관하던 건물로, 시보를 알리는 기능을 하던 곳.

개설

보루각은 1433년(세종 15) 가을에 완성되었으며, 그 안에 설치한 자격루는 이듬해인 세종 16년 7월 초하루부터 표준시간을 알려주기 시작하였다. 경회루 남쪽에 3간 건물을 세우고 그 안에 물시계를 설치하였는데, 시간을 알려주는 집이라 하여 보루각이라 이름 지었다.

내용 및 특징

동아시아의 전통사회에서 시간을 측정하고 시보하는 ‘수시’는 절대적으로 제왕의 독점적 권한으로 일반 백성들의 삶과는 관련이 크게 없었다. 동아시아의 전통 천문학을 ‘궁정 천문학’ 혹은 ‘왕립 천문학’이라 부르는 것도 이러한 특징 때문이다.

경복궁에는 큰 물시계를 설치하기 위해 지은 전각이 2개 있었다. 흠경각과 보루각이 바로 그것이다. 보루각은 장영실이 만든 자격루가 설치되어 있는 전각이고, 흠경각은 세종이 애용한 물시계이자 장영실이 만든 옥루가 있는 곳이다. 보루각은 1433년(세종 15) 가을에 완성되었으며, 그 안에 설치한 자격루는 이듬해인 세종 16년 7월 초하루부터 표준시간을 알려주기 시작하였다(『세종실록』 16년 7월 1일).

자격루는 보루각이라고 이름 붙은 건물 안에 설치되어 있었다. 따라서 자격루를 보루각과 합해서 보루각루(報漏閣漏)라고도 부른다. 자격루를 이용한 시보 서비스를 시작한 지 3년 뒤의 기록인 「간의대기」에 보루각 건물과 자격루에 대한 자세한 묘사가 나온다.

이수광의 『지봉유설』에 따르면, 흠경각은 보루각에 이어 1438년에 창건되었으며 경복궁 강녕전 옆에 있었다. 뒤에 불탄 것을 1554년(명종 9)에 그 옛 터에 재건하였으나 임진왜란으로 다시 소실되었다. 이때 종루도 불타는 바람에 종도 녹아버려 다시 칠 수 없게 되었다. 1602년(선조 35) 보루각의 자격루를 행궁 근처의 여염집에 이설하고 시간 관리를 전담하는 누국(漏局)을 설치하고 물시계를 교정하여 인정과 파루를 제때에 시보하였다.

선조를 이어 즉위한 광해군은 1609년(광해군 1) 10월부터 창덕궁 개수 공사를 시작하여 행궁에서 창덕궁으로 이전하게 되었다. 1613년(광해군 5) 8월 26일에 관상감에서 시보와 관련하여 누국을 개수해야 한다는 건의가 있었다. 이것은 대략 백성들에게 시각을 알리는 일은 하루도 폐할 수 없는 일인데, 행궁 안에 정부의 기관이 들어 있기에도 비좁아 행궁 밖 여염집에 누국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이 집의 지붕이 비가 새고 기둥도 기울어져 물시계에 물을 공급하는 장치와 시보장치의 구슬통로가 모두 제 기능을 못하여 시간을 제때에 알릴 수 없으므로 적절한 시기에 개수를 하도록 담당 관서로 하여금 서두르게 해달라는 내용이었다. 이러한 건의에 따라 광해군은 즉시 창경궁 문정문 밖에 보루각을 복원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광해군 대인 1614년에 이르러 창덕궁 서린문 안에 흠경각을 다시 세웠는데 처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모두 세 번 세운 셈이다. 1614년에 광해군은 보루각을 다시 세운 후 그 개수 과정을 의궤로 정리하게 했다. 현재 이름만 전하는 『보루각개수의궤』는 그 때의 상황을 정리한 것이다.

변천

보루각이 창설된 지 20년이 지난 1454년(단종 2)에 보루각과 자격루의 수리 문제가 대두되었으나 별 문제가 없었던지 그대로 사용하다가 1455년에 보루각을 개혁하여 관련 부서를 바꾸었다(『단종실록』 3년 2월 27일). 1464년(세조 10) 5월에는 자격루를 옛날 서연(書筵)으로 이전하였다가 1469년(예종 1) 10월에 보루각을 복구하였다. 1505년(연산군 11) 11월 24일에는 자격루를 창덕궁으로 이전하였는데, 어느 곳에 설치하였는지 분명하지 않다. 이후 1536년(중종 31)에 신보루각이 건립되고 나서는 경복궁 보루각으로 복구한 것으로 보이며, 그 후 임진왜란으로 유실될 때까지는 원래 보루각 자리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경복궁의 보루각에서 보내주는 시보로 운종가 종루에서 종을 울려 도성문을 여닫는 제도가 확립된 후 얼마간은 이것으로 시보를 알리는 데 충분하였다. 그러나 도시의 규모가 확대되고 유실과 재변에 대비하기 위하여 보루각 창설 53년 만인 1487년(성종 18)에 창덕궁에 새로운 보루각을 건설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관상감제조인 윤필상 등이 창덕궁 남쪽 담 안과 도총부 북쪽 담 밖의 빈터를 물색하였다. 이에 성종은 그해 2월 25일에 물색해 둔 보루각 터를 시찰하고 남쪽 담장 안의 빈터가 적합하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에 따라 그해 4월 초에 보루각을 건설할 춘궁도감을 설치하고 터를 닦는 공사를 시작하였지만, 가뭄이 들자 공사가 중단되었다. 1505년(연산군 11) 11월 24일 보루각을 창덕궁으로 이전하고 경복궁 간의대는 헐어버렸다(『연산군일기』 11년 11월 24일).

보루각을 창설한 지 100여 년이 지나니 자격루도 고장이 잦아지고 그동안 이곳저곳으로 옮겨 설치하느라 기계에도 많은 손상이 생겨 시간 측정 기능이 저하되었다. 1534년 9월 17일에 보루각이 오래되어 비가 새는 곳이 많다는 보고가 있었고, 이에 성종대에 중단된 보루각 공사를 재개하여 창덕궁에도 새로운 시보장치를 만들 것을 건의하였다.

이에 따라 1535년부터 공사를 하기로 결정하고 이듬해인 1536년(중종 31) 6월 신보루각이 완공되었다. 그해 8월 20일에 새로운 보루각도감에서는 구자격루에서는 하지 못했던 인정과 파루시각의 자동시보를 새로운 자격루에서 할 수 있다고 왕에게 보고하여 왕은 다음 날 현장을 시찰하였다(『중종실록』 31년 8월 20일). 이 자리에서 왕은 보루각 제조와 낭관 및 감조관 들의 서계(書啓)에 초기(抄記)를 내리면서 상급을 내릴 것을 지시하였다.

1536년 8월 24일에 신보루각 건설에 노고가 많은 관계자들에게 논공행상이 있었다. 보루각 건립 도제조인 영의정김근사와 우의정김안로, 제조인 우찬성유부, 공조판서최세절, 김수성, 자격장 박세룡이 참여하여 상을 받았다(『중종실록』 31년 8월 24일). 도제조인 김안로의 건의에 따라 자격장 박세룡은 그 후 보루각에 소속되어 물시계를 관리하였다.

신보루각 완공 뒤 중종은 이를 기념하여 장사룡과 소세양에게 각각 기(記)와 명(銘)을 짓게 하였다. 이에 심언광이 「보루각정시의명병서(報漏閣定時儀銘幷序)」를 지었는데, 이 글에 따르면 황제나 국왕의 의무로 하늘의 시간을 받아 백성에게 알리는 일을 뜻하는 관상수시(觀象授時)의 임무는 중국 고대 황제(皇帝)에서 비롯되어 당우(唐虞)에 이르러 제대로 시행되기 시작하여 주(周)와 한(漢)을 거치면서 선기옥형으로 발전되었다. 그러던 것이 곽수경에 이르러 여러 가지 의표(儀表)가 갖추어진 것을 우리 세종대에 더욱 발전시켜 보루각과 낮과 밤의 시간을 재는 데 사용된 기기인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등을 창제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천도가 오래되어 착오가 생기자 세종대의 구제에 따라 창경궁 동궁의 동쪽에 새로운 보루각을 건립하고 의기들을 새로 만들어 제왕의 치민에 기여하도록 하고 시간을 아껴 치적을 밝히기 바란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한편, 창경궁에 새로운 보루각을 건설한 뒤에는 경복궁과 창경궁의 보루각에서 시보를 종로에 전달하면 그곳의 종을 울려 4대문을 열고 닫았다.

참고문헌

  • 『서운관지(書雲觀志)』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국조역상고(國朝曆象考)』
  • 『제가역상집(諸家曆象集)』
  • 나일성, 『한국천문학사』, 서울대학교출판부, 2000.
  • 남문현, 『장영실과 자격루』, 서울대학교출판부, 2002.
  • 전상운, 『한국과학사』, 사이언스북스, 2000.
  • Needham, Joseph., Science and civilisation in China,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62.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