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의보(崇義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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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남도 단천에 속한 진보.

개설

숭의보는 관방시설로 종9품인 권관(權管)이 담당하였다. 김숭의(金崇義)라는 자가 그곳에서 죽어서 이름을 김숭의보로 하였다가 현종대에 숭의보로 이름을 고쳤다. 숭의보는 선조대에 이동보(梨洞堡)에 속하게 되면서 폐지되었다.

위치 및 용도

『여지도서』에 따르면 숭의보는 추운령(驅雲嶺)의 위쪽에 있었다고 한다. 『대동지지』에는 숭의보가 추운령의 북쪽 은룡덕대판(隱龍德大阪)의 위쪽에 위치했다. 현재는 함경남도 단천군에 속해 있다.

변천 및 현황

숭의보의 본디 이름은 김숭의보였다. 원래 이곳은 높고 험한 고개에 위치한 데다 곡식도 생산되지 않아 백성이 살 수 없었다.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 김숭의라는 자가 이곳에서 얼어 죽는 일이 발생하였다. 그래서 이 보의 이름을 김숭의보라고 했다고 한다.

『여지도서』에 따르면 숭의보는 1608년(선조 41)에 별장(別將)을 두어 지키도록 했으며, 함경도관찰사조계원(趙啓遠)의 요청에 의해 숭의보의 위치를 추운령 위쪽으로 옮겼으며 권관을 두었다고 한다. 현종대에는 보의 위치를 15리(약 5.9㎞) 아래로 옮겼다. 이때 영의정정태화(鄭太和)의 제안에 따라 보의 이름을 숭의보라고 고쳤다(『현종개수실록』 1년 2월 16일).

1687년(숙종 13) 12월에는 함경도관찰사박태상(朴泰尙)이 단천의 숭의보를 증산(甑山)으로 옮기자고 요청했다. 예전과 달리 북방의 근심이 사라져 단천에 속한 보 역시 쓸모가 없어졌다는 이유에서였다. 특히 단천의 4개 보 중에서 숭의보는 사람이 살 수 있는 여건이 좋지 못하였기 때문에 군사와 사람들이 날마다 줄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에 박태상이 숭의보를 증산으로 옮기자고 한 것이다. 이 요청에 영의정남구만(南九萬)은 중간에 있는 숭의보를 혁파하면 방어선이 끊어지기 때문에 조금 더 살펴서 결정하자고 하였다(『숙종실록』 13년 12월 7일). 원래 단천의 이동보가 숭의보에 속해 있었는데, 『대동지지』에 따르면 1608년(선조 41)에 혁폐되어 이동진에 예속되었다.

참고문헌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여지도서(輿地圖書)』
  • 『대동지지(大東地志)』
  • 『국조보감(國朝寶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