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대반야도량(消災大般若道場)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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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소재대반야도량 |
한글표제 | 소재대반야도량 |
한자표제 | 消災大般若道場 |
관련어 | 소재도량[消災道場], 인왕도량[仁王道場], 사대연성법석(四大緣成法席) |
분야 | 문화/종교/불교 |
유형 | 의식·행사 |
시대 | 고려~조선 |
집필자 | 이성운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소재대반야도량(消災大般若道場)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태조실록』 5년 1월 17일 |
불교 경전인 『대반야경』을 염송하여 재앙을 소멸하려는 법회.
개설
재앙을 없애기 위하여 반야경전을 염송하는 소재반야도량[消災般若道場]은 고려시대 이래 수차 개설되었는데, 그 개설 목적은 다양하였다. 조선시대에는 태조가 내전에서 단 한차례 소재반야도량을 개최하였는데, 새로 입궐한 대궐의 크고 작은 재앙을 소멸하고자 개설한 것으로 보인다.
연원 및 변천
불교를 숭상했던 고려시대 때는 재앙을 소멸하기 위한 각종 도량이 왕성하게 개설되었는데, 1047년(고려 문종 즉위) 3월 건덕전(乹德殿)에서 처음 시작된 이래 16회 개설되었다. 개설 목적은 주로 비를 빌기 위해서나 감옥이 빈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혹은 북계에서 변란의 기미가 보이고 농작물에 해를 끼치는 해충이 발생했을 때 이를 해소하기 위해서였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단 한차례 소재대반야도량이 개설된 사례가 나타난다. 1396년(태조 5) 태조가 승려 14인을 모아 궁궐에서 소재대반야도량을 개설하였는데(『태조실록』 5년 1월 17일), 설행 목적에 대한 기록은 없다. 태조 때 개설된 소재 불사는 소재반야도량을 비롯하여 『신중경』의 소재주 염송, 소재도량, 사대연성법석, 소재법석, 양재법석, 십이인연법석, 금경소재도량, 기양법석이나 기양도량 등이 있었다. 이 때 활용된 경전이나 다라니는 『인왕호국반야바라밀다경』이나 『금광명경』과 「소재길상다라니」 등이라고 할 수 있다.
태조가 소재반야도량을 개설한 목적은 언급되지 않았으나, 도성의 기초를 여는 것을 기념하는 각종 행사의 일환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소재반야도량을 열기 8일 전에 도성 북쪽에 있는 백악산과 다섯 방위의 신에게 제사를 올렸다. 또 태조는 이 해부터 새로 지은 궁궐에서 정무를 관장하기 시작했고, 국가적으로는 성을 쌓는 공사 등을 진행하고 있었다. 따라서 도성을 새로 연 후 각종 재앙을 예방하는 차원에서 『인왕반야바라밀다경』에 의거해 소재대반야도량을 개설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절차 및 내용
『인왕호국반야바라밀다경』의 「호국품」에는 인왕도량의 절차와 내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는데, 여기서 소재대반야도량의 절차도 유추해 볼 수 있다.
"일체 국토가 만약 어지러워지려고 할 때 모든 재난과 도적이 와서 파괴하니, 그대들 모든 왕은 반야바라밀다를 기억하여 외우며 도량을 장엄하게 꾸미어 100개의 부처님 형상을 모시고 100개의 보살상을 모시고 100개의 사자좌에 100명의 법사를 청하여 이 경을 설하라. 모든 자리 앞에는 갖가지 등을 켜고 갖가지 향을 사르고 여러 가지 꽃을 흩으며, 의복·와구(臥具)·탕약·방사(房舍)·자리[床座] 등 일체 공양하는 일로 널리 공양하며 매일 두 때[二時]에 이 경을 읽어라."
이처럼 인왕도량 등은 불보살과 호법신중을 청해 공양을 올리고 승려들에게 재를 올리며 재앙을 없애주기를 기원하는 순서로 진행되었다. 소재대반야도량 또한 이 같은 형태로 진행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인왕호국반야바라밀다경(仁王護國般若波羅蜜多經)』
- 『대정신수대장경(大正新修大藏經)』9
- 『인왕호국반야바라밀다경다라니념송의궤(仁王護國般若波羅蜜多經陀羅尼念誦儀軌)』
- 『대정신수대장경(大正新修大藏經)』19
- 김용조, 「조선전기의 국행기양불사연구」, 동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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