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해독제(嶽海瀆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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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에서 주요 산·바다·강의 신 11위(位)를 모시고 지내는 제사.

개설

『예기(禮記)』「왕제(王制)」에 나오는, “천자는 천하의 명산대천을 제사하는데, 5악(嶽)은 삼공(三公), 4독(瀆)은 제후에 비견하며, 제후는 경내의 명산대천을 제사한다[天子祭天下名山大川 五嶽視三公 四瀆視諸侯 諸侯祭名山大川之在其地者].”는 기록에 근거하여 시행되었다. 원래는 주나라 영토 안에 있는 악·독만을 대상으로 하였으나 중국의 영토가 확대됨에 따라 해(海)·진(鎭)이 추가되어, 천자는 5악·4진·4해·4독을 제사한다는 관념이 생겨났다.

삼국시대 이전부터 시작된 우리나라의 산천 신앙은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로 이어졌다. 조선시대에는 산천을 중요도에 따라 악해독과 명산대천으로 구분하여, 이를 국가 사전(祀典)에 중사(中祀)소사(小祀)로 각각 등재하고 그 제사를 시행하였다. 악해독에 대한 제사를 사전에 편입한 것은 호국(護國) 의식과 변경(邊境) 의식을 통해 중앙집권 체제를 확립하려는 정치적 의도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보다는 국가 경제의 기반인 농업을 위협하는 가뭄과 홍수 등의 자연재해를 극복하려는 민생 시책에 통치자들의 예(禮)에 관한 관념을 결합시켰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무속의 색채를 띤 민간의 산천 신앙을 일부 수용하였지만, 이를 유교적인 산천제로 전환하려고 노력하였다.

연원 및 변천

악해독에 대한 제사는 진한(秦漢)시대 이전부터 시행되었으나, 당나라 때 이르러서야 국가 사전에 중사로 편입되어 운영되었다. 그런데 당송(唐宋)시대에는 악해독제가 영험하다는 이유로 그 대상에 대한 광범위한 봉작(封爵)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현상은 명나라 건국 이후 태조 주원장(朱元璋)의 명에 따라 편찬된 『홍무예제(洪武禮制)』에 의해 비판을 받았다. 그에 따라 산천에 대한 봉작은 폐지되고, 다만 모악(某嶽)·모해(某海)의 신이라는 칭호만 쓰게 되었다.

우리나라에는 고대국가 형성기 이래 산악(山嶽) 신앙이 있었는데, 신라시대에는 삼국을 통일한 뒤 확대된 영토 관념을 당나라의 사전 의식과 결합시켜 산천에 대한 제사를 정리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따르면 산천에 대한 제사를 대사(大祀)·중사·소사로 구분하였는데, 경주 주위의 3산(山)에 대한 제사는 대사로, 5악(岳)·4진(鎭)·4해(海)·4독(瀆)에 대한 제사는 중사로, 기타 작은 산에 지내는 제사는 소사로 규정하여 체계화하였다. 이처럼 유교 의례로 자리 잡아가던 산천 제사는 고려시대에 이르러 큰 변화를 겪었다. 『고려사(高麗史)』「예지(禮志)」는 악해독 및 명산대천에 대한 제사를 대사·중사·소사에 포함되지 않는 잡사(雜祀)로 규정하였다. 고려시대의 산천 제사가 유교적인 제사라기보다는 민간의 신앙으로 기능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민간의 산천 신앙을 음사(淫祀)로 규정해 부정하였고, 고려시대에 이루어진 산천에 대한 봉작도 폐지하였다. 찰흙으로 만든 형상인 소상(塑像)을 대상으로 한 무속의 제사 또한 제단(祭壇)을 만들어 신위를 모시는 유교적인 제사로 바꾸었다.

1413년(태종 13)에는 산천을 그 중요도에 따라 구분하여 악해독에는 중사를, 명산대천에는 소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이때 악은 지리산(智異山)·삼각산(三角山)·송악산(松嶽山)·비백산(鼻白山)이고, 해는 동해(東海)·남해(南海)·서해(西海)이며, 독은 웅진(熊津)·가야진(伽倻津)·한강(漢江)·덕진(德津)·평양강(平壤江)·압록강(鴨綠江)으로 4악·3해·6독이었다. 천자국의 5악·4진·4해·4독과 비교해 보면, 진(鎭)이 없고 악과 해가 하나씩 줄어들었지만 독은 오히려 늘어났다. 세종 때는 여기에 두만강(豆滿江)이 추가되어 7독이 되었는데,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서는 7독을 4개의 방위로 분속시켰다. 즉 웅진·가야진은 남방, 한강은 중앙, 덕진·평양강·압록강은 서방, 두만강은 북방의 독으로 규정함으로써 4독 체제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였다.

『국조오례의』에 수록된 악해독제에 관한 제도는 조선후기까지 그대로 이어졌다. 그런데 『국조오례의』에는 2품의 관원이 5일간의 재계를 거쳐 섭행(攝行)한다고만 규정되어 있을 뿐, 왕이 친제할 때의 의식에 관한 기록은 없다. 반면에 영조 연간에 편찬된 『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에는 ‘왕이 악해독의 제단에서 친히 기우제를 지내는 의식인 친제악해독기우의(親祭嶽海瀆祈雨儀)가 새로 추가되었다. 또한 1725년(영조 1)과 1732년(영조 8)에는 실제로 왕이 직접 북교(北郊)의 악해독단에 이르러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비록 정례(正禮)가 아니라 긴박한 상황에서 이루어진 기우제(祈雨祭)라는 한계가 있지만, 왕이 몸소 제사를 지낸 것은 악해독제의 중요성이 좀 더 커졌음을 보여준다.

절차 및 내용

『국조오례의』에는 악해독에 대한 제사가 2월과 8월에 시행하는 정례와 가뭄이 심할 때 시행하는 기우제로 구분되어 있는데, 『국조속오례의』에는 왕의 기우 친제가 추가되었다. 기우 친제는 기우제의 일종이므로 재계 및 희생(犧牲) 등은 소사인 기우제의 격에 맞추었으나, 왕이 주관하였기에 행례(行禮) 과정은 정례와 비슷하였다.

악해독제는 중사이기 때문에 산재(散齋) 3일, 치재(致齋) 2일 등 총 5일간 재계하였으며, 2품관이 제관(祭官)으로 차정되어 제사를 주관하였다. 희생은 양 1마리와 돼지 1마리를 사용하였고, 제기·제수 등은 제사 이틀 전부터 마련하였다.

제사의 과정은 전폐(奠幣), 작헌(酌獻), 송신(送神)의 3단계로 진행한다. 전폐는 먼저 세 번 향을 올리고 폐백을 바친 다음 부복한 뒤에 몸을 편다. 친제의 경우, 전폐를 시행하기 전에 희생의 털과 피[毛血]를 묻는다. 작헌은 3헌으로 이루어지는데, 초헌관(初獻官)이 술잔을 올린 뒤 축문을 읽으면, 이후 아헌관(亞獻官)과 종헌관(終獻官)이 차례로 술을 올린다. 작헌이 끝나면 제사에 쓴 술과 고기를 맛보는 음복(飮福)과 수조(受胙)를 행한다. 그 다음 변두를 거두고 폐백을 처리하는데, 악(嶽)의 폐백은 구덩이에 묻지만, 해·독의 것은 물에 적신다. 끝나면 신위판을 신실에 봉안하고 예찬을 거둠으로써 의식이 끝난다.

생활·민속적 관련 사항

악해독제는 각각의 산, 바다, 강에서 지내는 정기제와 가뭄으로 인해 북교에서 사방의 악해독 신위를 모두 모시고 지내는 기우제가 있다. 후자의 경우 명산대천의 신위도 같이 모신다. 악해독제는 제후가 아니면 산천에 제사를 지낼 수 없다는 유교적인 원칙에서 마련된 것이지만 현실적으로 각지의 개별 제사 과정에서 적용되기가 쉽지 않았다. 빈번한 제사를 관찰사(觀察使)를 비롯한 지방관이 모두 시행할 수 없을뿐더러 실제 제사가 필요한 향촌민들의 참여는 자연스럽게 무속 의식의 개입을 초래할 수밖에 없었다. 16세기 이후 사림(士林)이 악해독을 비롯한 개별 산천에 대한 제사를 음사(陰祀)로 규정한 것은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참고문헌

  • 『삼국사기(三國史記)』
  • 『고려사(高麗史)』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
  • 『춘관통고(春官通考)』
  • 『구당서(舊唐書)』
  • 『신당서(新唐書)』
  • 『송사(宋史)』
  • 『예기(禮記)』
  • 『명집례(明集禮)』
  • 『홍무예제(洪武禮制)』
  • 김철웅, 『한국중세의 吉禮와 雜祀』, 경인문화사, 2007.
  • 이범직, 『韓國中世 禮思想 硏究』, 일조각, 1991.
  • 이욱, 『조선시대 재난과 국가의례』, 창작과비평사, 2009.
  • 한형주, 『朝鮮初期 國家祭禮 硏究』, 일조각,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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