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곡(推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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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시대 한국과 중국에서 제왕이 장군을 파견하던 군사의례 또는 특정인을 특정 지위에 추천하던 행위.

개설

중국의 역사에서 진한(秦漢) 이전에는 전차가 군사력의 핵심이었기에 장군을 파견할 때 추곡(推轂) 의례가 있었지만 이후로 전차의 중요성은 급격하게 하락되면서 추곡은 점차 사라지고 그 대신 ‘견장(遣將)’이라고 하는 새로운 군사 의례가 생겨났다. 조선전기에는 견장 의례 중 수절월(授節鉞) 절차만 수용되었지만, 영조대에 이인좌난의 진압을 계기로 선로포(宣露布)와 헌괵의(獻馘儀)까지 시행되었다. 이로써 조선시대 견장 의례는 수절월, 선로포, 헌괵의를 핵심으로 하게 되었다.

연원 및 변천

추곡은 ‘떠밀다’는 의미의 추(推)와 ‘바퀴’라는 의미의 곡(轂)이 합쳐진 용어로 ‘바퀴를 떠밀다’가 핵심 개념이다. 그런데 곡은 단순한 바퀴가 아니라 바큇살 안쪽의 바퀴를 특별히 지칭하는 용어이다. 이 곡은 축(軸)을 통해 다른 바퀴와 연결됨으로써 무한 회전하는 바퀴의 중심이 된다.

중국 역사에서 주나라 때의 전쟁은 전차를 핵심으로 하였다. 국력의 강약 역시 전차의 다과로 결정되었다. 이에 따라 주나라 때에는 제왕이 장군을 전쟁터로 파견할 때 장군이 탄 수레를 떠미는 특별한 의례가 있었다. 예컨대 『사기(史記)』에 의하면 중국의 상고(上古) 시대에는 왕이 장수를 전쟁터에 보낼 때 무릎을 꿇고 추곡하면서 말하기를, “곤(閫) 안쪽은 과인이 제압하고, 곤 바깥쪽은 장군이 제압하라” 했다고 한다. 여기서 언급된 ‘곤’은 문지방 또는 국경이란 의미로 제왕이 추곡하는 이유는 전쟁터에서의 생사여탈권을 장군에게 이양하기 위해서였다. 이 같은 의미가 확장되어 추곡은 특정인을 특정 지위에 추천한다는 의미로도 이용되었다(『숙종실록』 13년 3월 17일).

그런데 중국의 역사에서 진한 이후로 전차의 중요성은 급격하게 하락되었다. 이에 따라 제왕이 장군을 전쟁터로 보낼 때 거행하던 추곡은 점차 사라지고 그 대신 ‘견장(遣將)’이라고 하는 새로운 군사의례가 생겨났다. 『대명집례(大明集禮)』에 의하면 견장 의례는 오례(五禮) 중 군례(軍禮)에 포함되었으며 수절월(授節鉞), 조묘(造廟), 의사(宜社), 고무성왕묘(告武成王廟), 마제아독(禡祭牙纛), 주개(奏凱), 헌부(獻俘), 선로포(宣露布), 논공(論功)의 절차로 이루어졌다. 수절월은 제왕의 생사여탈권을 상징하는 절(節)과 월(鉞)을 장군에게 수여하는 절차이고, 조묘는 종묘에 고하는 절차이며, 의사는 사직에 제사하는 절차이고, 고무성왕묘는 강태공의 묘에 고하는 절차이며, 마제아독은 사령관의 깃발인 독(纛)에 제사하는 절차이고, 주개는 개선을 아뢰는 절차이며, 헌부는 포로를 바치는 절차이고, 선로포는 승전보를 선포하는 절차이며, 논공은 전공을 논의하는 절차이다.

이 같은 견장 의례 중에서 핵심은 제왕의 생사여탈권을 상징하는 절과 월을 장군에게 수여하는 ‘수절월’이었다. 이 수절월 의례는 고려시대는 물론 조선시대에도 수용되었다. 예컨대 조선시대에는 지방의 병마절도사, 수군절도사가 파견될 때 국왕이 절월을 수여하는 의례가 있었다. 하지만 조선전기까지는 수절월 이외의 견장 의례가 마련되지 않았다.

그런데 영조대에 견장 의례의 일부분인 ‘선로포’가 시행되었다. 그 계기는 이인좌난의 진압이었다. 즉 영조는 이인좌난을 진압한 오항명의 개선을 기리기 위하여 1728년(영조 4) 4월 19일에 선로포의와 헌괵의(獻馘儀)를 숭례문에서 거행하였던 것이다(『영조실록』 4년 4월 19일). 당시의 헌괵의는 견장 의례 중 헌부(獻俘)에 해당했다. 이때의 선로포와 헌괵의가 『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의 군례 중에 규정됨으로써 조선시대 견장 의례는 수절월, 선로포, 헌괵의를 핵심으로 정비되었다.

절차 및 내용

1728년(영조 4) 4월 19일에 숭례문에서 거행된 선로포와 헌괵의는 다음과 같은 절차로 이루어졌다. 먼저 사도도순무사(四道都巡撫使)오명항이 군대를 정돈하여 조정으로 돌아와 남쪽 성 밖에 진을 쳤다. 영조는 숭례문의 문루(門樓)에 올라가서 영접하였는데, 승지를 보내 오명항과 군사들을 위로하였다. 이어서 오명항이 노포문(露布文) 즉 승전보를 올렸다. 뒤이어 헌괵의가 다음과 같이 거행되었다. 먼저 오명항이 황금 투구에 붉은 갑옷을 입고 꿇어앉아서 역적 3명의 수급을 단하(壇下)에서 올렸다. 이를 신하가 받아 단상(壇上)에 진열하였고, 대신이 수급을 받은 뒤 문루에 올라가 복명하였다. 영조는 수급을 장대에 매어달라고 명하였다. 이어서 자신을 수행하고 온 군사들로 하여금 군악(軍樂)을 연주하게 하였다. 이어 오명항에게 명령하여 가까이 들어오게 하고 앞으로 나오게 한 다음 대화하였다. 이어서 영조가 선온(宣醞)하라고 명하고 스스로 큰 술잔에다 술을 따라 친히 내려 주었고, 대화가 끝나자 환궁(還宮)하였다. 이어서 도순무사(都巡撫使)와 출정(出征)했던 중군별장(中軍別將)에게 모두 선정전(宣政殿)으로 들어오라고 명하고, 출정했던 군졸들은 대궐 문 밖에서 호궤(犒饋)하라 명하였다.

생활·민속적 관련 사항

장군이 탄 수레를 제왕이 직접 밀던 추곡은 진한 이후로 절월을 주어 파견하고 나중에 승전보와 포로를 받는 의례로 발전하였다. 특히 이 의례 중에 포로의 수급을 장대에 매다는 절차가 포함됨으로써 역적에 대한 국왕의 엄벌 의지가 전국의 백성들에게 널리 퍼질 수 있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경국대전(經國大典)』
  • 『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
  • 『주례(周禮)』
  • 『대명집례(大明集禮)』
  • 국사편찬위원회 홈페이지(http://www.history.go.kr)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 시소러스 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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