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괵(獻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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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군이나 도적의 무리를 죽이고 그들의 머리나 왼쪽 귀를 베어 왕에게 바치는 의식.

개설

헌괵(獻馘)은 전쟁에 승리한 이후 적군이나 도적의 머리나 왼쪽 귀를 베어 왕에게 바치는 의식이다. 조선초기부터 시행되었으며, 헌괵의(獻馘儀) 의식이 정비되어 행해진 것은 1433년(세종 15) 파저강(婆猪江) 여진족을 토벌하고 개선하였을 때부터이다. 헌괵과 관련한 의례가 크게 정비된 것은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을 토벌하고 난 뒤 예조 판서이정구(李廷龜)에 의해서였다. 1728년(영조 4) 무신란(戊申亂)을 토벌한 이후 다시 헌괵의 의례를 시행하였고, 1744년(영조 20) 『국조속오례의』를 편찬하면서 「군례(軍禮)」에 새로운 의례로서 선노포의(宣露布儀)를 수록하면서 그 속에 헌괵의 절차를 함께 수록하였다. 이후 18세기 말인 정조대에 『춘관통고』를 편찬하면서 헌괵의(獻馘儀)를 따로 수록하면서 헌괵의 절차가 완비되었다.

연원 및 변천

전쟁에 승리한 이후 죽인 적의 머리나 왼쪽 귀를 조정에 바치는 헌괵은 조선초기부터 시행된 것으로 보인다. 1396년(태조 5) 2월 풍해도도관찰사송문중(宋文中)이 왜선(倭船) 1척을 잡아 헌괵하였다는 기사를 통해 이를 확인할 수 있다(『태조실록』 5년 2월 13일). 1433년(세종 15) 평안도절제사최윤덕(崔潤德)이 파저강 여진족을 토벌하고 올린 보고에서 휘하의 이순몽(李順夢)이 최윤덕에게 헌괵하지 않은 것을 탄핵한 것으로 볼 때 적어도 헌괵은 최고 지휘관이 베어 낸 적의 머리와 귀의 숫자를 정확히 보고하여야 하는 중요한 사안이었다(『세종실록』 15년 5월 7일). 헌괵 의식이 세종 이전에도 체계적으로 정비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하지 않지만 1426년(세종 8) 10월 세종이 군사를 거느리고 대열(大閱)을 시행할 때 모의로 헌괵 의례를 시행한 것을 통해 대략적인 절차는 마련되었던 것으로 보인다(『세종실록』 8년 10월 3일).

최윤덕의 파저강 여진 정벌전 승리를 보고받은 직후 세종은 이 승리를 높게 평가하여 이를 직접 종묘에 고하여야겠다고 하고 신하들의 동의를 얻었다. 이에 예조에서 파저강 여진족을 토벌하고 평정한 것을 옛 제도에 의하여 종묘에 고하고 중외에 포고하여 하례할 것을 청하자 세종이 이에 따랐다(『세종실록』 15년 5월 11일). 아울러 종묘에 여진족을 토벌하여 평정한 것을 고한 후에 백관의 조하를 받는 조하의례(朝賀儀禮)의 구체적인 의주(儀註)까지 정하였다. 이를 계기로 헌괵과 고묘(告廟)의 의례를 정비하고 행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여러 차례의 여진족 또는 왜구 토벌에서도 헌괵은 중요하게 다루어졌다. 특히 임진왜란을 계기로 장수들의 전공을 포상하는 것과 관련하여 헌괵은 전공을 평가하는 중요한 요소로 강조되었다. 임진왜란 초기의 혼란으로 인해 전투에서 승리한 이후 헌괵하지 않고 전공을 보고하는 경우가 적지 않아 조정에서 군공을 포상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이에 1593년 7월 선조는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노획한 적군의 물건과 함께 적의 머리[首級]를 함께 올려 전공을 매길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도록 하였다(『선조실록』 26년 7월 25일). 헌괵을 기다린 이후 전공을 논하도록 한 것은 임진왜란 중 대체로 지켜졌다.

헌괵과 관련한 의례를 크게 정비한 것은 17세기 초 인조대에 들어서였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으로 한성이 함락되었으나 이괄 휘하의 기익헌(奇益獻) 등이 이괄, 한명련(韓明璉) 등을 죽이고 항복하였다. 이에 인조는 피난 온 공주의 행재소(行在所)에서 병위(兵威)를 성대하게 벌였고, 항복한 적장들은 군문에 나아가 죄를 청하며 자신들이 벤 이괄과 한명련 등의 머리를 장대 끝에 매달아 바쳤다. 이어 인조는 종묘의 신주를 임시로 봉안한 곳에 나아가 적을 평정한 것을 고하고 헌괵하는 예를 거행하였다(『인조실록』 2년 2월 15일). 이때 행한 의례는 당시 예조 판서이정구가 정한 의주를 따랐던 것으로 보인다.

이괄의 난 이후 한동안 대내외 전쟁이 일어나지 않아 헌괵의 의례가 시행되지 않다가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 등이 일으킨 무신란을 토벌한 이후 다시 헌괵의 의례를 시행하였다. 무신란이 평정되자 영조는 목이 베인 정희량(鄭希亮) 등의 머리를 소금에 절여 보관해 놓고 반란의 진압을 위해 출정하였던 도순무사오명항(吳命恒)이 돌아오면 적의 머리를 바치는 헌괵의 예를 거행하도록 명령하였다(『영조실록』 4년 4월 13일). 며칠 지나 오명항이 군사를 거느리고 개선하자 영조는 직접 숭례문 문루에서 그를 맞이하고 이어 교리정우량이 지은 노포문을 바치고 헌괵의 의례를 진행하였다. 이때 진행된 헌괵의 절차에 따라 먼저 오명항이 황금 투구에 붉은 갑옷을 입고 꿇어 앉아 이웅보(李熊輔), 정희량, 나숭곤(羅崇坤)의 세 머리를 단 아래 바치자 판의금부사김흥경이 이를 받아 단위에 늘어놓았다. 이어 영의정이광좌(李光佐)가 적의 머리를 받아 확인하고 문루로 올라가 보고하자, 영조가 이를 모두 장대에 매달라고 명령하여 모두 보이게 하였다(『영조실록』 4년 4월 19일).

1755년(영조 31) 5월 일어난 윤혜(尹惠)의 역모 사건에도 영조가 직접 친국(親鞫)하고 효수(梟首)한 이후 헌괵하였다(『영조실록』 4년 4월 19일). 19세기 초인 1812년(순조 12) 평안도에서 일어난 대규모 내란인 홍경래(洪景來)의 난을 진압한 이후에도 노포(露布)를 작성하고 헌괵의 의식을 거행하였다(『순조실록』 12년 5월 6일).

절차 및 내용

헌괵의 절차는 대체로 전쟁을 마치면 최고 지휘관은 휘하 장수들로부터 사로잡은 적의 수와 사살하여 베어 낸 적의 머리와 귀의 수를 자세히 집계하여 조정에 보고하는 것으로 진행되었다. 아울러 수집한 적의 머리와 귀를 조정으로 보내는 것이 원칙이었으며, 조정에서는 적군의 머리나 귀가 도착하면 전승을 알리는 글인 노포를 신하들이 지어 먼저 올리고 나서 적의 머리나 귀를 바치도록 하였다.

헌괵의 의례와 그 세부 절차는 중국의 여러 의례를 참조하여 조선초기에 대략적으로 마련한 것으로 보이나 그 절차를 체계적으로 정비하지는 못하였다. 헌괵 의례의 절차를 본격적으로 마련한 것은 이괄의 난 평정 직후 이정구에 의해서였다. 그 헌괵의 의주와 절차는 『춘관통고』 권75에 정리되어 있다. 이에 의하면 행사 당일 인조가 융복(戎服) 차림으로 친히 시어소의 어좌(御座)에 임한 가운데 성대하게 병위를 벌여 군악을 연주하면서 백관과 유생이 내외로 나누어 순서대로 선다. 이어 도체찰사이원익(李元翼)이 적이 평정되었음을 천하에 알리기 위해 써서 게시하는 노포를 갖추고 군진의 문 밖에서 헌괵하면, 선전관이 이를 가지고 와서 계단에 놓는다. 그러면 병조 판서가 마지막으로 이 머리가 적괴(賊魁)의 수급인지를 확인하고 왕에게 아뢴다. 이를 마치면 곧바로 종묘에 고하는 고묘례(告廟禮)를 행하고 백관의 진하를 받았다.

1744년(영조 20) 8월 『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를 편찬할 때 「군례(軍禮)」에 새로운 의례로서 노포를 선포하는 선노포의를 수록하면서 그 속에 헌괵의 절차도 함께 수록하였다. 이후 18세기 말인 정조대에 『춘관통고』를 편찬하면서 헌괵의(獻馘儀)를 단독으로 수록하였다. 이를 통해 영조대 『국조속오례의』 단계에서 헌괵의 절차를 대부분 정비하고, 18세기 말에 수정 보완한 것으로 보인다. 그 구체적인 절차는 다음과 같다.

역괴의 수급이 진(陣)의 밖에 도착하면 전설사(典設司)는 어좌를 시어소에 설치한다. 정전(正殿)에는 군악을 문 안에 벌여 놓으며 북이 초엄(初嚴)을 울리면 병조는 여러 부(部)를 지휘하여 전정에 의장을 벌여 놓는다. 북이 이엄(二嚴)을 울리면 여러 시위 및 종관(從官)은 평상시처럼 입시하고 종친과 문무백관은 융복에 검을 차고 동서로 나누어 각각 자리에 선다. 여러 도의 관찰사는 반열에 끝에, 수령·찰방·유생 등은 외정(外庭)에 선다. 북이 삼엄(三嚴)을 울리면 통례가 바깥 준비가 되었음을 왕에게 아뢴다. 왕이 융복을 입고 정전으로 나오면 군악을 울린다. 그러면 도체찰사 등이 노포를 받들고 나아가고, 적의 머리를 선전관과 의금부 당상에게 진문(陣門)의 밖에서 전하면 선전관 등은 적의 머리를 가지고 섬돌 위에 벌여 놓는다. 그러면 병조 판서는 나아가 왕 앞에 무릎을 꿇고 역괴의 머리가 실제임을 아뢴다.

생활·민속적 관련 사항

헌괵은 군례의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로서 18세기 초 대규모 내란인 무신란을 계기로 이를 평정하고 승리한 사실을 만방에 선포하는 국가적인 사건을 의례화하는 과정에서 절차를 완비하였다. 의례에서 행해지는 상징적인 여러 절차를 통해 왕실의 권위를 드러내고 민심의 규합을 도모하였다.

참고문헌

  • 『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춘관통고(春官通考)』
  • 송지원, 「영조대 儀禮 정비와 『國朝續五禮儀』 편찬」, 『한국문화』50, 2010.
  • 임선빈, 「인조의 공산성 駐蹕과 후대의 기억」, 『조선시대사학보』68, 2014.
  • 정다함, 「征伐이라는 戰爭/征伐이라는 祭祀」, 『한국사학보』52, 2013.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