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묘신사(辛卯信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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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1년(숙종 37) 조선에서 일본의 제6대 장군 덕천가선의 취임을 축하하기 위하여 파견한 외교사절. 신묘통신사라고도 함.

개설

신묘신사는 일본의 제6대 장군의 취임을 축하하기 위하여 파견된 사행이었다. 그러나 당시 장군의 정치 고문이었던 신정백석(新井白石)의 통신사빙례 개정·개혁에 의하여 일본국왕호(日本國王號)·범휘(犯諱) 문제 등 많은 마찰이 발생하였던 사행이었다.

연원 및 변천

1711년 조선에서는 일본의 제6대 장군 덕천가선(德川家宣)의 취임을 축하하기 위하여 신묘통신사를 파견되었다. 정사조태억, 부사임수간, 종사관이방언 등의 삼사(三使)를 비롯하여 480여 명이 1711년 5월 15일 서울을 떠나 이듬해 2월 25일 귀국하였다. 그러나 당시 장군의 정치 고문이었던 신정백석이 대등·간소화라는 기본 방침을 세우고 통신사 접대 규정을 개정하려고 하였다. 그 내용은 장군 호칭을 대군(大君)에서 국왕(國王)으로 변경할 것, 장차 장군이 될 약군(若君)에 대한 빙례(聘禮)의 중지, 예조에서 노중(老中)에게 보내는 폐백(幣帛)과 서계(書契)의 정지, 강호까지 가는 중간에서 통신사에게 베풀어 주는 연향(宴享)의 축소, 강호성(江戶城)에 들어가 장군을 만날 때 국서를 정사(正使)가 받들고 전달할 것 등 통신사 대우의 적정화, 경비의 절약, 일본의 예(禮)에 따르게 한다는 등이었다(『숙종실록』 37년 4월 12일). 신정백석이 통신사 접대 규정을 개정하려고 했던 이유는 막부의 전례와 의식을 정비하여 장군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서였다. 결국 일본의 복호 요구에 대하여 조선에서는 조선을 모욕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 내의 대명(大名)에게 장군의 권위를 과장하려는 것에 의도가 있다는 것과 일본이 처음에는 일본국왕이라고 하였고, 후에 대군이라고 고쳤기 때문에 조선도 개서해 왔던 것인데, 지금에 와서 다시 왕이라고 칭하는 것을 금할 수는 없다는 것, 일본 장군이 국내에서 왕이라고 개칭한 것을 알면서 국서를 고쳐 보내지 않을 수 없다는 의견으로 논의가 모아졌다(『숙종실록』 37년 5월 27일).

신묘통신사행에 대한 막부의 접대 준비는 1709년(숙종 35) 1월 5대 장군 덕천강길(德川綱吉)이 사망한 때로부터 1711년 11월 1일 조선 왕의 국서를 장군에게 전달하는 의식 절차인 전명의식(傳命儀式)을 행할 때까지 약 2년 반의 기간이 소요되었다. 우선 막부는 1709년 토옥정직(土屋政直)을 통신사 접대 총책임자로 임명하였다. 임무는 통신사 일행 500명과 일본인 수행원 2,000여 명의 대규모 인원의 원활한 운영과 접대를 위한 외교 의례, 재정 문제, 숙소와 음식 접대, 연로의 시가지 정비와 치안 문제 등이었다. 그리고 접대의 실무 지휘 담당자와 실무진을 임명하였다. 1710년에는 연로변의 정비를 시작하여 시가지의 가옥을 정비하고 청소, 화재 예방, 예의범절, 도시경관 정비, 의복 청결 등 구체적인 지시 사항을 담은 포고문을 시달하였다.

1711년 11월 통신사 일행은 조선 왕의 국서를 장군에게 전하기 위하여 강호성(江戶城)에 올라갔다. 통신사행원과 막부 및 대마번의 호위 인원을 포함하여 2,000명이 넘는 인원이 강호 중심가를 통과하여 오전 10시경에 강호성에 도착하였다.

한편 신묘통신사행이 강호에 있을 때 국서(國書)에 조선 왕과 일본 장군의 휘자(諱字)를 각각 범하였다는 이유로 분쟁이 발생하였다. 일본에서는 종래 범휘(犯諱)의 규제가 없었기 때문에 이 문제 역시 신정백석의 조일 양국의 대등화라는 방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숙종실록』 37년 12월 30일). 신묘신사는 조선 왕의 휘자를 범한 답서를 그대로 가지고 귀국할 수도 빈손으로 귀국할 수도 없었지만, 계속적인 항론은 사신의 굴욕이며 국가의 치욕이 되고 장래도 우려된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대마도주에게 휘자를 범한 답서를 반환하고 동시에 서둘러 조선 조정에 치계를 하여 조선 국왕의(왕의) 국서를 고쳐 보내도록 한 후 일본에서 국서를 고쳐 양국의 국서를 조선으로 돌아가는 길목에서 교환하되 서식은 개정하지 말고 전례대로 하며, 이것을 규약으로 맺을 것을 제안하였다. 이렇게 해서 양자의 타협이 이루어지고, 이 문제는 양국이 각자 국서를 고쳐서 대마도에서 교환하는 것으로 일단락을 보게 되었다. 이 분쟁 과정에서 대마도주는 통신사행이 귀국길에 대판성(大阪城)에 도착하였을 때 강호성에서 범휘자를 고쳐서 내렸다는 강호에서의 상황을 보고하였다. 이에 대하여 통신사의 정사였던 조태억은 조선 조정에 즉시 알렸다(『숙종실록』 38년 1월 9일). 결국 대마도에서 고쳐진 국서의 교환이 이루어지고 통신사는 귀국하였는데, 그 귀국 도중에 비바람에 의하여 부사의 선박이 파손되어 사망자도 생기고 선박들이 뿔뿔이 흩어져 표류하는 상태가 되었다가 겨우 좌수영(左水營)에 도착하였다. 왕성에 들어간 통신사 일행은 곧바로 구속되어 정사·부사·종사관은 감금되었다가 이후 삭탈관직을 당한 후 한양에서 쫓겨나는 처벌을 받았다(『숙종실록』 38년 3월 9일)(『숙종실록』 38년 3월 27일).

이상과 같은 외교 의례 변경을 둘러싼 일련의 사건은 일본 내에서도 큰 논쟁거리가 되었다. 신정백석은 통신사행 접대의 총책임자였던 노중(老中) 토옥정직과 대학두(大學頭) 임봉강(林鳳岡), 대마도의 우삼방주(雨森芳洲) 등으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다. 이와 같이 외교 의례 변경이 대내외적으로 많은 문제를 일으키자 일본의 8대 장군 덕천길종(德川吉宗)은 조일외교의 틀을 5대 장군 덕천강길(德川綱吉)대의 예로 되돌렸다. 덕천길종의 장군직 계승을 축하하는 통신사 파견에 앞서 대마번과 대마번에 파견된 문위역관(問慰譯官) 사이에 성립된 통신사강정절목(通信使講定節目)에 의하면 장군의 대호(大號) 및 국서 내외면의 예식은 1682년에 파견되었던 임술(壬戌)통신사행의 예에 따르며, 장군의 호칭은 대호는 대군으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어서 1719년(숙종 45) 기해통신사부터는 다시 ‘일본국대군’ 칭호가 다시 사용되게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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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손승철, 『조선시대 한일관계사 연구』, 지성의 샘,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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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우봉, 「조선시대의 통신사 외교와 의례 문제」, 『조선시대사학보』58, 2011.
  • 신윤정, 「1711년 신묘통신사 접대개정: 復號문제와 犯諱문제를 중심으로 」, 경희대학교 석사논문, 2008.
  • 三宅英利, 『근세일조관계사の연구(近世日朝關係史の硏究)』, 文獻出版, 19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