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각법석(圓覺法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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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각경』을 독송하며 망자(亡者)의 극락왕생을 발원하는 법회.

개설

불교에서는 추천(追薦)을 위해서는 망자의 업장을 참회케 하고 좋은 공덕을 닦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설한다. 이때 필요한 것이 부처의 경전을 독송하는 일인데, 의식의 종류와 목적 등에 따라 다양한 경전이 사용되었다. 그중 『원각경』이 법석에 활용된 것은 제법(諸法)의 실상을 밝혀 망자가 자신에 대한 집착을 끊고 왕생극락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가르침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원각법석(圓覺法席)은 각 칠재 5일 전에 시작하여 칠재일에 회향한다. 조선시대의 국행 원각법석은 태조와 정종의 상사(喪事) 때 추천을 위한 칠칠재 법석으로 행해졌다.

연원 및 변천

원각법석에서 독경하는 『원각경』의 원래 명칭은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大方廣圓覺修多羅了義經)』으로, 1권 12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중국당나라 고종 연간에 북인도계빈국(罽賓國)의 승려 불타다라(佛陀多羅)가 한역하였다. 대승(大乘)·원돈(圓頓)의 교리를 설한 것으로 주로 관행(觀行)에 대한 설명이 주를 이루는데, 문수보살·보현보살·미륵보살 등 12보살이 불타와 일문일답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고려시대에 지눌(知訥)이 이 경을 요의경(了義經)으로 중시하여 널리 보급하였다. 또 승려들의 전문 교육 기관인 강원(講院)에서 교과 과목으로 채택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고려시대에는 원각법석이 설행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칠칠재의 추천 불사로 설행되었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갑자기 새로운 불교 의례를 창안해 설행했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 왕실에서 원각법석이 처음으로 개최된 것은 1408년(태종 8) 태조의 추천 불사 때와(『태종실록』 8년 7월 1일), 1418년(세종 1) 정종의 3재 선행 법석에서였다(『세종실록』 1년 10월 11일). 이후 상왕인 태종의 명에 따라 법석이 폐지되었으므로, 국행 원각법석은 더 이상 시행되지 않았다. 그러나 민간에서는 조선시대 중기 이후에도 상례에서 망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원각경』을 널리 독송하였다. 오늘날에도 승려나 재가 신도들의 상례 때 영가의 왕생극락을 기원하며 『원각경』 「보안장」을 독송한다.

한편 조선시대에는 원각법석과 유사한 불사로, 『원각경』을 강설하는 원각법회가 설행되기도 하였다(『세조실록』 10년 5월 2일). 하지만 이 법회는 망자의 추천보다는 중생의 교화와 공덕을 짓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절차 및 내용

원각법석의 절차는 여느 법석의 작법절차와 다르지 않다. 먼저 단을 설치하고, 해당 부처를 청해 모시고 공양을 올린 뒤 경전을 염송한다. 『원각경』은 10,000여 자(字)에 불과한 경전이므로, 5일의 법석 기간 동안 매일 수회씩 독송한다. 끝으로 망자의 극락왕생을 기원하고 마친다.

참고문헌

  • 『작법절차(作法節次)』
  • 신규탁, 『원각경 현담』, 정우서적,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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