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로례(養老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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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왕이나 지방관이 노신(老臣) 등을 초대하여 술과 음식을 대접하고 공경의 뜻을 보이는 행사.

개설

양로례는 국왕이 성균관에 나아가 알성(謁聖)과 시학(視學)을 한 후에 수반되는 행사이다. 학문과 덕행이 있는 노신들에게 술과 음식을 대접하고 가르침을 구하였다.지방에서는 수령이 향교에서 관내의 노인을 대상으로 거행하였다.

연원 및 변천

조선 왕조는 유학이 융성하였고, 유학의 중심 사상이 충효였던 만큼 왕조 내내 여러 차례에 걸쳐 양로례가 실시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양로례가 실시된 사례는 거의 확인되지 않는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1478년(성종 9)에 성종이 처음 양로례를 실시했다[『성종실록』 9년 2월 23일]. 다음으로는 1742년(영조 18)에 영조가 양로례를 실시하려고 하였으나 흉년 등의 이유로 실행하지 못했다[『영조실록』 18년 4월 9일].

양로연은 대개 왕이 성균관에 거둥하여 알성과 문묘에 제사를 지내고 시학을 행한 뒤에 열렸다. 알성은 왕이 공자의 위패가 봉안된 문묘에서 제사를 지내는 것이고, 시학은 유신(儒臣)·성균관 유생 등과 경서(經書)의 난해한 뜻을 논하는 것이다. 이때 혹 취사(取士)하거나 양로례를 거행하기도 한다.

양로례는 지방관이 거행하기도 하였다. 1495년(연산군 1) 경상도안음현감(安陰縣監)으로 부임한 정여창(鄭汝昌)이 재직 시에 봄·가을로 향교에서 현 내의 노인을 초청하여 시행했다[『명종실록』 21년 6월 15일].

절차 및 내용

양로례의 절차는 다음과 같다. 먼저 왕이 면복(冕服)을 갖추고 문묘에 작헌(酌獻)하고 나서 명륜당에 물러나 자리를 잡는다. 다음으로 왕이 노신들에게 반주를 권하는 윤유(酳侑)의 예를 행한다. 또한 왕이 노신들에게 가르침을 구하고, 모든 신하는 각각 진계(陳戒)의 말을 한다. 마지막으로 왕이 “안으로는 여색에 빠지면서 밖으로는 사냥에 몰두하는 것, 단술을 즐겨 마시는 것, 높고 큰 집과 조각한 담장에 거처하는 것, 이 네 가지가 그릇된 일임을 내가 스스로 깨우치는 바이다. 이제 모든 노신들이 말한 바가 모두 수신·치국에 긴요한 말이니, 내 마땅히 마음에 남기어 잊지 아니하고 저버리지 않도록 하겠다.”고 말한 후 마쳤다.

참고문헌

  • 『태학지(太學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