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산대천제(名山大川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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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각지의 산천 23개소에서 지내던 정기 제사 및 기우 등을 위한 비정기 제사.

개설

조선시대에 국가에서 시행한 소사(小祀)로, 전국의 명산대천 23처에서 중춘(仲春)과 중추(仲秋) 초에 정기적으로 지냈다. 또한 필요에 따라 수시로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는데,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이 기우제였다. 산천 신의 힘을 빌려 비를 얻고자 한 것인데, 그 사례는 조선초기부터 『조선왕조실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태종실록』 5년 5월 8일)(『태종실록』 15년 6월 3일). 1474년(성종 5)에는 기우하는 공식 절차에 명산대천제가 포함되었으며, 이는 조선말기까지 이어졌다. 그밖에 왕의 외부 행차가 있을 경우, 경유하는 곳의 명산대천에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다(『세종실록』 1년 4월 17일)(『중종실록』 20년 2월 28일). 1729년(영조 5)에는 효장세자(孝章世子)의 발인을 앞두고 재궁(梓宮)이 지나는 곳에서 도로교량제, 명산대천제를 지냈다(『영조실록』 5년 1월 24일).

명산대천제를 지내는 23처는 1414년(태종 14)에 정해졌는데, 경성(京城)의 목멱(木覓), 경기도의 오관산(五冠山)·감악산(紺岳山)·양진(楊津), 충청도의 계룡산(雞龍山)·죽령산(竹嶺山)·양진명소(楊津溟所), 경상도의 우불신(亐弗神)·주흘산(主屹山), 전라도의 전주 성황(全州城隍)·금성산(錦城山), 강원도의 치악산(雉嶽山)·의관령(義館嶺)·덕진 명소(德津溟所), 풍해도(豐海道: 현 황해도)의 우이산(牛耳山)·장산곶이[長山串]·아사진(阿斯津)·송곶이[松串], 영길도(永吉道: 현 함경도)의 영흥 성황(永興城隍)·함흥 성황(咸興城隍)·비류수(沸流水), 평안도의 청천강(淸川江)·구진 익수(九津溺水)등이었다(『태종실록』 14년 8월 21일).

연원 및 변천

명산대천제는 개별 산천에 지낸 제사로, 중사(中祀)산천제(山川祭)와 구분된다. 산천제는 국내의 산천 일반을 추상화하여 대상으로 삼은 제사로, 서울의 풍운뇌우산천성황단(風雲雷雨山川城隍壇)에서 지냈다. 산천단은 처음에는 숭례문(崇禮門) 밖에 있었는데, 1406년(태종 6)에 남산 양지 쪽 율현(栗峴) 서동(西洞)으로 옮겼다(『태종실록』 6년 1월 28일).

조선초기에는 고려시대의 사전(祀典) 체제를 답습하다가, 주로 태종~세종 연간에 명산대천제의 의례를 정비하였다. 1413년(태종 13)에는 사전을 개정하였는데, 이때 명나라의 『홍무예제(洪武禮制)』에 의거하여 산천의 봉작을 일제히 삭제하였으며, 그에 따라 각 산천의 사당에 그 신의 처첩·자녀·생질 따위의 신상(神像)을 설치하여 제사하던 것도 모두 폐지하였다. 또한 산천에 지내던 제사를 정비하여 악해독(嶽海瀆) 13처에는 중사를, 명산대천 24처에는 소사를 지내도록 규정하였다(『태종실록』 13년 6월 8일).

여러 산천에 명산대천제라는 이름의 제사를 지내게 하고, 국가에서 선정한 제사처가 아닌 곳에 지내는 제사를 ‘음사(淫祀)’로 규정하여 탄압한 것은 종교 생활에 대한 중앙정부의 지배를 천명한 것이었다. 따라서 명산대천제는 산천에 대한 제사를 유교의 틀 안에 포섭하는 방향으로 개편이 이루어졌으며, 의례의 내용 또한 무속적인 면을 없애 유교적인 제의로 변모시켰다. 세종 때는 각지의 산천 단묘 현황을 조사하기 위해 산천단묘순심별감(山川壇廟巡審別監)을 각 도에 파견하였고, 예조(禮曹)에서 그 조사 결과와 일차적인 개혁 사항을 보고하였다(『세종실록』 12년 8월 6일). 좀 더 본격적인 개혁안은 1437년(세종 19)에 발표되었는데 이를 보면, 신위판(神位版)의 제도 등을 개혁하는 데 『홍무예제』를 준용했음을 알 수 있다(『세종실록』 19년 3월 13일).

명산대천제는 단순히 각 지역의 산천신에게 정기적으로 제사를 지낸 데 그치지 않았으며, 기우처로서 중요하게 생각되었기 때문에 태종~세종대의 명산대천제 개편과 유교식 제의 도입만으로 각 산천신에 대한 무속적 신앙이 완전히 포섭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일시적으로 영험한 산천을 찾는 경향이 잔존하기는 했지만 점차 제장(祭場)이 설치된 산천에 대한 제사는 지방관 주도로 행해지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조선시대의 산천 제사는 중사인 악해독, 소사인 명산대천, 그 이하 등급의 소재관 치제소로 나뉘게 되었고 그 밖의 산천에 지내는 제사는 음사로 규정하여 배척하게 되었다.

절차 및 내용

명산대천제를 지낼 때는 해당 신위(神位)를 설치하되 한가운데에 있게 하고, 남쪽을 향하게 하며, 자리는 모두 왕골자리로 한다(『세종실록』 오례 길례 서례 신위).

헌관(獻官)은 소재관 수령(守令)이 맡는다. 소사의 규례에 따라 재계는 산재(散齋) 2일, 치재(致齋) 1일 등 총 3일간 행하며, 찬실(饌實)은 영성(靈星)과 같이 한다. 제사 하루 전에 찬만(饌幔), 의례를 거행하는 자리 등을 마련해 둔다.

제사 당일에는 축시(丑時) 5각(刻) 전에 제사 음식을 차리고 신위판을 올려둔다. 3각 전에 헌관과 집사관들이 각기 알맞은 옷을 갖춘다. 찬자(贊者)와 알자(謁者)는 미리 네 번 절한다. 1각(刻) 전에 집사관들이 절하는 자리[拜位]에 나아간다. 집사관이 모두 네 번 절하고 손을 씻은 뒤 잔을 씻는다. 헌관이 들어와 네 번 절하고 손을 씻은 뒤 신위에 세 번 향을 올리는 삼상향(三上香)을 행한다. 그 후 폐백을 신위 앞에 올린 다음 내려와 자리로 돌아간다. 헌관이 다시 신위 앞에 나아가 첫 번째 잔을 올리는 초헌례(初獻禮)를 행하고, 이어서 두 번째, 세 번째 잔을 올리는 아헌례(亞獻禮)와 종헌례(終獻禮)도 같이 한다.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길례」에 따르면, 음복(飮福)과 수조(受胙)를 한 뒤 네 번 절하고 철변두(撤籩豆)를 한다. 헌관이 네 번 절한다. 헌관이 망예위(望瘞位)로 나아가 축판과 폐백을 묻는 것을 보고 나면 알자가 모든 의식이 끝났다는 뜻에서 ‘예필(禮畢)’이라고 한다. 헌관이 나간다. 집사관들이 네 번 절하고 나간 뒤 장찬자(掌饌者)가 신위판을 보관하고 제사 음식을 치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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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민속적 관련 사항

오늘날 산천에 대한 제사는 그 양식 면에서 지역별로 큰 편차를 보인다. 바닷가나 강가의 부군당굿은 해양 문화의 영향을 받았으며 굿놀이 양식을 고수하여 무속적인 성향이 강하게 남아 있지만, 산신제 계열의 경우 굿판을 벌이는 경우가 매우 드물며 대개 유교식 제례로 치러진다. 산천을 비롯한 자연물에 대한 신앙을 유교적 사전 체제 안으로 포섭하려던 조선시대 지배층의 시도는 자연환경에 따라 다른 결과를 나타냈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 박흥주, 『서울의 마을굿』, 서문당, 2001.
  • 이욱, 『조선시대 재난과 국가의례』, 창작과비평사, 2009.
  • 이욱, 「조선전기 유교국가의 성립과 국가제사의 변화」, 『한국사연구』118, 2002.
  • 허흥식, 「조선전기 경상도의 산천단묘와 그 특징」, 『민족문화논총』28,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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