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제(酺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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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뚜기·나방 등 농작물의 충해가 심할 때 이를 기양(祈禳)하기 위하여 포신(酺神)에게 지내는 제사.

개설

포제(酺祭)는 포단(酺壇)에서 지낸다. 포단은 마보단과 동일한 곳에 있으며 포신을 향사한다. 농작물에 충해(蟲害)가 심할 때 포신에게 지내는 제사다. 포신은 재해(災害)의 신이다. 『예설』에 포(酺)라는 것은 포(布)나 보(歩)의 뜻이며, 포덕(布徳)을 포제라고 하며 그 신(神)을 보라 한다고 하였다. 『오례통고』에서 포는 민물(民物)에 재해를 내리는 신이며, 인귀지보(人鬼之步)나 연명지보(蝝螟之步) 같은 것이라고 하였다.

연원 및 변천

1408년(태종 8) 7월 17일에 예조에서 포제를 행하는 의식을 아뢰었는데, 이에 따르면 포제는 송 고종 때부터 그 형식을 갖춘 것 같다(『태종실록』 8년 7월 17일).

1525년(중종 20) 8월 2일에 황해도 신천·안악·문화 등지에 가뭄이 들고 충재(蟲災)가 있어서 포제를 지내도록 하였다. 영조 및 정조 때에 특히 벌레에 의한 잦은 피해가 있었다. 1768년(영조 44)에 호남에 가뭄이 들고 황충이 일어나 포제를 행하도록 명하였다. 『일성록』에 의하면 1786년(정조 10) 윤7월 1일에 왕이 호남의 포제에 쓸 향축(香祝)을 회계(回啓)하기를 기다릴 것 없이 도성문이 열리면 즉시 내려보내라고 명하였다. 윤7월 14일에는 포제에 쓸 향축을 경상도에 내려보내라고 명하였다.

절차 및 내용

포제의 절차와 내용은 1408년(태종 8) 7월 17일에 예조에서 인용한 『문헌통고』에 잘 나와 있다. 『연려실기술』「사전전고(祀典典故)」를 보면 주·현의 포제는 포신을 단상 남향으로 설치하고 변(籩)과 두(豆)는 각각 네 개씩 놓는다고 하였다.

이규경(李圭景)은 『오주연문장전산고』「만물편」 중 황남변증설(蝗蝻辨證說)에서 “우리나라는 비록 황충은 없었지만 충재는 있었다. 그런데 1759년(영조 35)에 해서와 호서 연해에 황충이 크게 일어났다. 크기는 작지만 생긴 것은 매미 같았다. 1768년 대한(大旱)이 들어 큰 안개가 있은 지 며칠 안 있어 병충해가 크게 발생하여 산군율전(山郡栗田)에 남은 것이 없었다. 이에 포제를 열어 기양하였더니 일시에 충해가 모두 없어져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다.”고 하였다.

생활·민속적 관련 사항

조선이 멸망한 이후 포제 의식도 사라졌는데, 유독 제주도에서만 존속되어 온 점은 특기할 만하다. 제주도에서는 마을을 수호하고 있는 신이 둘 이상 있다고 믿고 있다. 하나는 마을의 남성사회에서 신앙하여 유교식으로 제사를 지내는 포신이고, 다른 하나는 여성사회에서 신앙하여 무속으로 굿을 하는 본향당신(本鄕堂神)이다. 포신에 대한 제사를 포제라 하고, 본향당신과 기타 신에 대한 굿을 당굿이라 한다. 포제는 포제단이 마련되어 있는 마을이 많아 그곳에서 지내고, 당굿은 각 마을의 본향당에서 굿을 한다.

참고문헌

  • 『오례통고(五禮通考)』
  • 『일성록(日省錄)』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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