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황발고제(城隍發告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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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제를 시행하기 전에 성황신에게 고유하는 제사.

개설

조선시대에 제삿밥을 얻어먹지 못하는 귀신 즉 무사귀신(無祀鬼神)을 모아서 드리는 제사를 여제(厲祭)라고 한다. 그 제단은 중앙의 경우 북교(北郊: 현 서울 창의문 밖 근교), 지방의 경우 각 군현에 하나씩 설치되어 있다. 여제의 대상은 홍수와 가뭄으로 죽은 귀신, 도적 때문에 죽은 귀신, 굶주림이나 병에 걸려 죽은 귀신, 담장이나 지붕에 깔려 죽은 귀신 등 다양했는데, 성종대에 편찬된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서는 이것을 15가지 유형으로 규정하였다. 이렇게 대상이 다양하고 또 대부분 변괴로 죽은 귀신이기 때문에 이들을 효율적으로 통제할 별도의 존재가 필요하였는데 이것을 성황신이 담당하였다. 따라서 여제가 시행되기 전에 성황신에게 고유제를 지내 뭇 영혼을 불러 모아달라고 부탁했던 의식이 성황발고제이다.

여제의 선행 단계로 설정된 성황발고제는 태종대 그 제사 의식이 마련된 뒤 『국조오례의』에 소사(小祀)의 등급으로 설정되었고, 이후 별다른 변화 없이 조선말기까지 시행되었다.

연원 및 변천

성황제는 이미 오래전부터 중국이나 고려에서 독자적인 제사로 시행되었지만 이곳에서 시행되는 발고제는 무사귀신을 제사하는 여제의 제도적 확립을 전제로 한다. 이런 관점에 볼 때 중국에서의 성황발고제는 여제가 국가 사전에 소사로 편입된 명나라에서 시작된 것으로 파악된다. 명에서는 국도의 남쪽에 여단(厲壇)을 설립하여 무사귀신을 모아 양과 돼지를 희생으로 삼아 제사를 지냈다.

명나라의 제도를 본받아 조선에서는 1404년(태종 4)에 여제단이 설립되었고(『태종실록』 4년 6월 9일), 1416년(태종 16)에는 여제의 성황발고법(城隍發告法)이 제정되었다. 그런데 성황발고가 시행되는 장소는 도성의 남쪽에 있었던 풍운뇌우단(風雲雷雨壇)에서였다(『태종실록』 16년 8월 5일). 이것은 지방의 성황단과 달리 중앙의 성황단 신위는 별도의 제단에서 모셔진 것이 아니라 명나라의 『홍무예제(洪武禮制)』에 근거하여 산천의 신위와 더불어 풍운뇌우단에 합사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즉 남교(南郊: 현 남대문 밖 근교)에 풍운뇌우단을 설치하여 풍운뇌우신을 정위(正位)로 삼아 제단의 가운데에 두고 배위(配位)로 산천의 신을 동쪽에, 성황신을 서쪽에 각각 두었기 때문에 성황발고는 성황신이 있는 풍운뇌우단에서 시행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성황단의 위치에 대해 세종대의 박연(朴堧)은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그는 여제를 시행하기 전 성황신에게 먼저 고하는 방식은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그 장소가 남교인 풍운뇌우단인 것은 예제에 맞지 않는다고 비판하였다. 풍우뇌우단은 천신(天神)이고 산천단과 성황단은 지기(地祇)인데, 이 양자를 합쳐서 제사하는 것에 문제가 있을 뿐 아니라 어찌 상위의 천신 앞에서 하위인 성황신에 고유할 수 있느냐며 반대하였던 것이다. 결국 그는 산천단과 성황단을 별도로 설립하자고 주장하였다(『세종실록』 12년 2월 19일). 박연의 주장은 의례상으로 타당했지만 이미 시행되어온 시왕지제(時王之制), 즉 현재 명나라에서 시행되는 제도를 바꿀 수 없다는 반론에 의해 수정되지 않았다.

성황발고제는 태종대에 그 제도가 마련되었음에도 『세종실록』「오례」에는 그 기록이 보이지 않다가 『국조오례의』에 이르러서야 수록되었다. 이후의 연대기 자료에서는 고종대까지 성황발고를 시행한 사례가 나오지만 『국조오례의』의 내용을 수정했다는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그대로 준용된 것으로 보인다.

절차 및 내용

『국조오례의』 길례 의식에는 여제의 의식으로 중앙에서 시행되는 여제의(厲祭儀)와 지방에서 시행되는 주현여제의(州縣厲祭儀)가 수록되어 있다. 이 2가지 의식은 모두 성황발고(城隍發告)와 북교치제(北郊致祭)의 2단계로 구성되어 있다. 성황발고와 북교치제는 한 의주 속에 수록되어 있지만 성황발고는 풍운뇌우단에서, 북교치제는 여제단에서 별도로 시행될 뿐 아니라 전자가 시행된 3일 후에 후자가 시행되기 때문에 확연하게 구분되었다.

성황발고는 중앙의 경우 한성부(漢城府) 당상(堂上)이, 지방의 경우 관찰사(觀察使)를 비롯한 지방관이 제관(祭官)이 되어 시행한다. 중앙의 의식을 기준으로 진행과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제사의 과정은 준비과정과 당일에 실제 제례를 행하는 행례의 2단계로 구분된다. 준비과정은 소사의 등급에 맞게 제사 3일 전부터 헌관(獻官)이 재계를 시행하는데, 산재(散齋)가 2일이고, 치재(致齋)는 1일이다. 산재는 제관이 치재에 앞서 몸을 깨끗이 하고 행동을 삼가는 것으로, 일상 업무는 정상적으로 수행했으며 평소의 자기 집의 침소에서 잤다. 치재는 산재 이후 제사가 끝날 때까지 재계하는 것으로, 치재 기간에는 전적으로 제사에 관련된 일에만 전념하였다. 제사 1일 전부터 당일까지는 제수 및 헌관의 자리 등을 설치하는 진설의 과정이 있다.

제사의 구성은 신위에게 폐백을 올리는 전폐(奠幣)의 과정은 없이 술을 올리는 헌례(獻禮)만 있었다. 의식은 헌관이 지정된 자리로 나가면서 시작되었다. 먼저 헌관이 신위에게 3번에 걸쳐 향을 피우는 삼상향(三上香)을 행한다. 다음에 헌관이 신위에게 술잔을 올리고 엎드렸다가 일어나면 축인(祝人)이 축문을 읽는다. 끝나면 헌관이 몸을 엎드린 후에 일으켜 편 후 자리로 돌아온다. 헌례는 3번이 아닌 1번으로 그친다. 헌례가 끝나면 변(籩)과 두(豆)를 옮기고, 집사(執事)들이 4배를 시행한다. 예가 끝났다는 뜻으로 예필(禮畢)이라고 아뢰면 헌관은 퇴장한다. 집사들이 신위판을 거두고 제사에 쓴 폐백을 묻으면 의식이 종결된다. 성황발고에서는 제사에 올린 술과 고기를 맛보는 음복(飮福)과 수조(受胙)의 과정이 없다. 성황발고를 시행한 지 3일 후에 북교치제가 이루어진다.

생활·민속적 관련 사항

조선시대에는 죽은 자를 모시는 제사를 대단히 중요하게 여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저런 사정으로 제삿밥을 먹을 수 없었던 존재들은 이름 없는 민초들이었다. 당시 백성들은 이들이 원통함 때문에 분과 한을 품고 뭉쳐서 역질을 발생시키고 화기를 해쳐 변괴를 낳는다고 생각함으로써 민간 신앙과 결합되었다. 특히 대규모 기근과 뒤이은 전염병의 확산은 민심을 이탈시키고 왕조의 기틀을 뒤흔들 수 있는 사건이었기 때문에 왕조에서도 서둘러 여제를 시행하며 민심을 달랬던 것이다. 이 상황에서 규범적인 유교적 제사로 강행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고, 때문에 민간의 정서를 수용하여 성황신을 매개로 이들 귀신들을 달래는 제사를 지냈는데, 이것이 성황발고라는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참고문헌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
  • 『춘관통고(春官通考)』
  • 『명집례(明集禮)』
  • 『홍무예제(洪武禮制)』
  • 김문식·한형주·이현진·심재우·이민주, 『조선의 국가제사』, 한국학중앙연구원, 2009.
  • 김철웅, 『한국중세의 길례와 잡사』, 경인문화사, 2007.
  • 이범직, 『한국중세 예사상 연구』, 일조각, 1991.
  • 이욱, 『조선시대 재난과 국가의례』, 창비, 2009.
  • 최광식, 『고대한국의 국가와 제사』, 한길사, 1994.
  • 최종성, 『조선조 무속 국행의례 연구』, 일지사, 2002.
  • 한국종교사연구회편, 『성황당과 성황제』, 민속원,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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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욱, 「17세기 厲祭의 對象에 관한 연구」, 『역사민속학』9,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