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사(明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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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대의 건립과 멸망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기술한 기전체 역사서.

개설

중국 정사(正史)로 인정받는 이십사사(二十四史) 중 최후에 완성된 『명사(明史)』는 약 청조 초기부터 약 100여 년에 걸쳐 완성되었는데, 명 태조주원장(朱元璋)의 홍무(洪武) 원년 1368년부터 사종(思宗)숭정(崇禎) 17년인 1644년까지 276년에 걸친 명조의 역사를 담고 있다. 구성은 본기(本紀)와 표(表), 열전(列傳) 등으로 구성되는 기전체 체제를 따랐으며 총 336권에 이른다. 중국 정사 중 『사기(史記)』, 『한서(漢書)』, 『후한서(後漢書)』, 『삼국지(三國志)』 등 역대의 사서(史書)를 계승하여, 그 내용이나 가치 면에서 뛰어난 역사서로 평가된다. 그러나 『명사』의 「조선열전(朝鮮列傳)」에서 조선이 종속국의 위치로 서술되어 있는 데다 『대명회전(大明會典)』, 『황명조훈(皇明祖訓)』 등 명 황실에서 간행된 책에 조선 태조이성계의 세계(世系)가 잘못 기재되어 있어 조선에서는 이를 고치기 위해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영조는 청의 『명사』의 수찬 작업이 막바지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듣고 변무주청사(辨誣奏請使)이탱(李樘)을 파견해 조선에 관한 사실을 바로잡아달라고 주청하기도 하였다(『영조실록』8년 5월 8일) (『영조실록』8년 5월 9일) [『영조실록』부록 행장].

편찬/발간 경위

『명사』의 편찬은 청조가 건립된 다음 해인 1645년(청 순치 2)에 찬수에 대한 의론이 시작되어 대학사(大學士)빙전(馮銓), 홍승주(洪承疇), 이건태(李建泰) 등이 총재로 임명되었고 찬수를 위한 명사관(明史館)이 설립되었다. 빙전은 사료 확보를 위해 노력했지만 사료가 흩어져 있거나 유실되어 있는 등의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고 결국 편찬 사업의 중단과 재개가 반복되었다. 1679년(청 강희 18)에 이르러서야 한림원 학사엽방알(葉方﨟)을 총재로 하여 본격적인 편찬 사업이 재개되었다. 결국 강희제는 『명사』의 완성을 보지 못한 채 붕어하였고 그 뒤 5년이 지난 1735년(청 옹정 13)에야 전체가 완성되었다. 그러나 곧바로 간행되지 않다가 실질적인 간행은 1739년(청 건륭 4)에 이루어졌다. 『명사』 간행에 90여 년이나 걸린 것은 강희제가 『명사』 편찬에 있어 무엇보다 사료와 내용의 정확성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서지 사항

전본(殿本)과 사고본(四庫本)의 두 판본이 있다. 이 중 사고본은 전본이 간행된 후 오자 등을 바로잡아 개수(改修)한 것이다. 1932년에 대만의 고궁박물관(古宮博物館)에서 영인하였다.

구성/내용

총 336권으로, 기전체 방식에 따라 「목록(目録)」 4권으로부터 권1부터 24권까지는 총 24권의 「본기(本紀)」, 권25부터 권99까지는 총 75권의 「지(志)」, 권100부터 권112까지는 총 13권의 「표(表)」, 권113부터 권332까지 총 220권의 「열전(列傳)」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 「본기」는 태조(太祖)부터 장열왕(荘烈帝)까지 16명을 다루고 있다. 「지」는 대통력(大統暦)이나 회회력(回回暦) 등의 역법, 각 지역의 지리, 교사(郊祀) 등의 제례를 다룬 예(禮) 등을 다루었으며 「열전」은 역대 황후를 비롯해 명대의 역사적 인물 및 조선, 일본, 안남 등 외국을 다루는 조목이 포함되어 있다.

참고문헌

  • 동북아역사재단 엮음, 『명사 외국전 역주』, 동북아역사재단, 2011.
  • 전세영, 「명대 중국의 조선관 연구 : 명사 「조선열전」을 중심으로」, 『21세기정치학회보』21권 1호,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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