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락문(창덕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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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의 연경당과 낙선재의 정문.

개설

장락문(長樂門)은 궁궐의 많은 영역에서 문의 이름으로 사용하였다. ‘장락(長樂)’이라는 말은 ‘무궁토록 즐거움을 누리라’는 의미이기에 전각의 주인이 길이 복락을 누리기를 바라는 축원이 들어 있다. 『한비자』「공명」편에 “존엄한 군주의 지위를 가지고 충신을 제어하면 즐거움이 생기고 공명을 이루게 된다.” 하였고, 『논어』「이인」편에도 “오직 어진 사람만이 길이 즐거움에 처한다.”는 말이 있다. 왕이 어거할 지소라면 당연히 ‘장락’을 기원하였을 것이다. 또한 한나라의 장락궁이 대비를 상징하는 대표적 상징어였기 때문에 대비의 전각에도 ‘장락’이라는 이름을 많이 썼다. 장락문은 창덕궁의 연경당과 낙선재의 정문을 일컫는데, 고종대에 중건한 경복궁의 자경전 영역에도 같은 이름의 문이 있었다.

위치 및 용도

창덕궁에는 연경당과 낙선재라고 하는 왕가의 사적 공간이 궁궐의 형식을 벗어나 사가의 풍모를 띠고 지어졌다. 공교롭게도 연경당과 낙선재 두 집 모두 남쪽 행각의 정문에 장락문이라는 이름을 썼으며, 문의 형태도 비슷하다.

연경당은 창덕궁의 후원 영역의 깊숙한 곳에 부용지와 부용정, 주합루 등이 들어 있는 장소보다 더 북쪽에 자리 잡고 있다. 장락문 앞에는 작은 개울이 있어 나무로 조성된 다리를 건너 들어가도록 되어 있다.

낙선재는 창덕궁의 남쪽 끝자락에 약간 남서쪽으로 틀어져 앉은, 본래 낙선당과 수강재가 있던 동궁 영역에 조성된 집이다. 낙선재 영역의 남쪽 행각은 석복헌과 수강재를 감싸고 길게 연이어졌는데, 낙선재 마당으로 들어가는 가장 서쪽의 문이 장락문으로 낙선재의 정문이다.

변천 및 현황

1827년(순조 27)에 아버지 순조의 명으로 대리청정을 시작했던 효명세자는 여러모로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었다(『순조실록』 27년 2월 9일). 대리청정을 시작한 다음 해에 명확히 어떤 용도로 조성하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소박하고 조촐한 여염의 집을 닮은 연경당을 건설하여 왕가의 웃전들을 모시고 연향을 베풀기도 하였다. 지금 남아있는 연경당과 당시의 연경당은 모습이 다르지만 현재 보물 1770호로 지정되었고 장락문 역시 현재 잘 남아있다.

낙선재는 1847년(헌종 13)에 헌종이 경빈김씨를 후궁으로 들이면서 지었다. 낙선재는 석복헌·수강재 등과 함께 3개 영역으로 나뉘어졌는데, 낙선재는 왕의 공간, 석복헌은 경빈김씨의 공간, 수강재는 대비마마를 위한 공간으로 조성되었다. 현재에도 그 형태가 잘 남아있다. 장락문의 현판은 흥선대원군이하응의 친필을 각자한 것이다.

형태

연경당의 장락문과 낙선재의 장락문은 형태가 비슷한데, 모두 행각의 사이에 한 칸 규모의 솟을문으로 서 있다. 사주문(四柱門)에 판장으로 문짝을 달고 문 인방 위에는 홍살을 설치했다. 서까래 끝에 부연을 달지 않은 홑처마에 맞배지붕이다. 대문의 바깥쪽에 장락문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궁궐지(宮闕志)』
  • 문화재청 편, 『궁궐의 현판과 주련 2』, 수류산방,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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