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의윤씨(광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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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23년(인조 1) = ?]. 조선의 15대 왕인 광해군(光海君)의 후궁. 본관은 파평(坡平)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능성현령(綾城縣令)을 지낸 윤홍업(尹弘業)이며, 어머니 창원 유씨(昌原兪氏)는 유필영(兪必英)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이조 참판(찬判에) 추증된 윤경(尹暻)이고, 증조할아버지는 윤선철(尹先哲)이다.

광해군의 후궁

윤숙의(尹淑儀)는 1617년(광해군 9) 광해군의 후궁으로 간택되어 입궁한 후 숙의(淑儀)에 봉해졌다.(『광해군일기』 9년 8월 8일),(『광해군일기』 9년 8월 18일) 이듬해인 1618년(광해군 10) 소의(昭儀)로 품계가 올랐으며,(『광해군일기』 10년 7월 8일) 1619년(광해군 11) 산실(産室)을 설치하라는 기사로 보아 이 때 딸을 출산한 것으로 보인다.(『광해군일기』 11년 4월 8일)

1623년(인조 1) 3월 13일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났다. 그리고 윤숙의는 음행(淫行)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다음 날 군문(軍門) 밖에서 사형에 처해졌다.(『광해군일기』 15년 3월 14일),(『인조실록』 1년 9월 14일)

묘소와 후손

윤숙의의 무덤은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사능리광해군과 자신의 딸 무덤이 있는 근처에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묘와 묘비석이 상당히 훼손된 채로 방치되어 있으나 옹주 묘가 근처에 있고 사위인 음성 박씨(陰城朴氏) 집안에서 제사를 이곳에서 따로 지냈다는 증언이 있다.(http://blog.naver.com/green_kiki/140156968805)

윤숙의는 광해군과의 사이에서 1녀가 있다. 광해군의 유일한 외동딸이었으나 인조반정으로 인해 아버지 광해군은 유배를 가고 어머니는 세상을 떠났던 때 그녀의 나이 5세였다. 나이가 너무 어렸기 때문에 목숨만은 살려주고 폐서인이 되어 옹주 책봉을 받지 못한 채 외삼촌의 집에서 성장하였다. 이후 인조(仁祖)는 그녀에게 장성할 때까지 요미(料米)를 주라고 명하였고,(『인조실록』 2년 3월 26일) 1641년(인조 19) 7월 광해군이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나자 그 딸에게 쌀 10석과 콩 5석 및 각종 찬물(饌物)을 주어 제사 준비를 할 수 있게 해주었다.(『인조실록』 19년 9월 17일) 또한 광해군의 본궁(本宮)에 살게 하며 전택(田宅)과 노비 및 기타 먹을 것을 넉넉히 주어 광해군의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승정원일기』인조 19년 8월 25일],[『승정원일기』인조 19년 9월 1일],[『승정원일기』인조 19년 9월 15일] 그리고 광해군의 상(喪)이 끝나자 혼례를 할 수 있도록 혼수를 지급했다.(『인조실록』 21년 4월 18일),[『승정원일기』인조 21년 4월 19일] 광해군의 딸은 박징원(朴徵遠)과 혼인하였다.[『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권23 「인조조고사본말(仁祖朝故事本末)」]

참고문헌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인조실록(仁祖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記略)』
  •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지두환, 『광해군과 친인척』, 역사문화,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