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언군 이녹생(林堰君 李祿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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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399년(정종 1) ~ 1450년(문종즉위) = 52세]. 조선 전기 세종 때 활동한 왕자. 정종(定宗)이방과(李芳果)의 서출 15남 8녀 중에서 제 8왕자. 봉작(封爵)은 임언정(林堰正)인데, 임언군(林堰君)에 추증되었다. 자는 장수(長壽)이고, 호는 선학(鮮鶴) 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어머니는 윤숙의(尹淑儀)이다. 윤숙의가 낳은 4남 1녀 중에서 둘째아들인데, 동복형은 수도군(守道君)이덕생(李德生)이고, 동복아우는 석보군(石保君)이복생(李福生), 장천군(長川君)이보생(李普生)이고, 동복누이는 인천옹주(仁川翁主)다.

효행왕자

1399년(정종 1) 정종이 왕위에 오른 해에 태어났다. 정종이 왕위를 이방원(李芳遠)에게 양위하고 황해도 풍덕(豊德)에서 살 때 부모 슬하에서 자라면서 효도를 다하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1419년(세종 1) 20세 때 아버지 정종이 승하하자, 슬픔을 견디지 못하여 정종의 왕릉인 후릉(厚陵) 곁에다 묘막(墓幕)을 짓고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였다.

1430년(세종 12) 4월 원윤(元尹)이 되었고, 1444년(세종 26) 7월 정3품상 명선대부(明善大夫) 임언정이 되었다. 세종 시대 종학(宗學)에서 전력을 다하여 학문에 절차탁마(切磋琢磨)하여 훌륭한 문사(文士)가 되었다. 그러나 1431년(세종 13) 4월 종부시(宗簿寺)에서 아뢰기를 “원윤 이덕생(李德生)과 이녹생이 연고를 칭탁하고 종학(宗學)에 나아가지 않는 일이 많습니다.”고 하여, 세종이 이덕생과 이녹생의 구사(丘史)를 거두라고 명하였다. 또 1433년(세조 15) 이녹생이 병을 칭탁하고 종학에 나가지 않았다고 종부시에서 아뢰었으므로, 세조가 그 구사를 회수하였다. 1450년(문종 즉위) 8월 6일 향년 52세로 돌아갔다.

묘소와 후손

시호는 혜안(惠安)이다. 묘소는 처음에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자동리에 있었는데, 후일에 파주시 월농면 도내리 산 묘좌원(卯坐原)에 면례하였다. 효령대군파(孝寧大君派) 이기형(李起亨)이 신도비문(神道碑文)를 지었다. 1982년 6월 28일 신도비 제막식을 거행하였다. 1872년(고종 9) 임언군과 영종정경(領宗正卿)에 추증되었다.

부인은 고령 박씨(高靈朴氏)박부(朴溥)의 딸인데, 1남 2녀의 자녀를 두었다. 1자는 장택부정(長澤副正) 이효자(李孝慈)이고, 장녀는 권윤신(權允信)의 처가 되었고, 차녀는 신여걸(辛汝傑)의 처가 되었다. 서출이 1남 1녀인데, 1자는 달성부수(達城副守) 이효의(李孝義)이고, 1녀는 안처선(安處善)의 처이다.

참고문헌

  • 『정종실록(定宗實錄)』
  • 『세종실록(世宗實錄)』
  • 『문종실록(文宗實錄)』
  • 『국조보감(國朝寶鑑)』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紀略)』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