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축(李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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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38년(중종 33)∼1614년(광해군 6) = 77세]. 조선 중기 선조~광해군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형조 판서(刑曹判書)·의정부 참찬(參贊)이고, 봉작(封爵)은 평난공신(平難功臣) 1등으로 완산군(完山君)에 봉해졌으며, 증직(贈職)은 영의정(領議政)이다. 자(字)는 자임(子任)이고, 호(號)는 사촌(沙村)이다. 시호는 안양(安襄)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극포군(極浦君)이희남(李希男)이고, 어머니 의령남씨(宜寧南氏)는 이조 참판(吏曹參判)남세준(南世准)의 딸이다. 양녕대군(讓寧大君)의 현손이며, 오천군(烏川君)이사종(李嗣宗: 양녕대군의 맏손자)의 조카이다.

선조 초기에 늦은 나이로 과거에 급제하여 황해도 안악 군수(安岳郡守)가 되었을 때, 사전에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을 발각하여 고발한 공으로 평난공신(平難功臣) 1등에 봉해졌다. 선조 말기에 형조 판서(刑曹判書)가 되었다가, 의정부 우참찬(右參贊)을 거쳐, 한성부 판윤(判尹)을 세 번, 공조 판서를 두 번 역임하였다. 광해군 때 조용히 은거하며, 시(詩)와 바둑으로 여생을 보냈다.[비문]

선조~광해군 시대 활동

1567년(선조 즉위) 사마시(司馬試)의 생원과(生員科)로 합격하였는데, 나이가 30세였다. 그 후 9년이 지난 1576년(선조 9) 식년(式年) 문과의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39세였다.[『국조방목(國朝榜目)』] 바로 승문원(承文院) 부정자(副正字)에 보임되었다. 1581년(선조 14) 사헌부 감찰(監察)에 임명 되었고, 호조 좌랑(戶曹佐郞)으로 전임되었다. 그 후 예안 현감(禮安縣監)으로 나갔다가, 조정으로 들어와 형조·공조의 정랑(正郞)을 역임하였다.[비문]

1586년(선조 19) 함안 군수(咸安郡守)가 되었다가, 1588년(선조 21) 안악 군수(安岳郡守)로 부임하였다. 당시 전라도 일대에서 명망이 높았던 정여립(鄭汝立)은 진안(津岸) 죽도(竹島)에 본거지를 두고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하였는데, 매달 활쏘기 모임을 열어 세력을 확장시켜나갔다. 그 후 대동계의 조직은 전라도와 황해도를 중심으로 확대되었는데, 이축(李軸)이 안악 군수(安岳郡守)가 되었을 때, 안악의 변숭복(邊崇福)과 해주의 지함두(池涵斗) 등이 함께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하여, 무술을 단련하며,『정감록』의 <망이흥정설(亡李興鄭說: 이씨가 망하고 정씨가 일어나다는 설)>을 퍼뜨리고 민심을 선동하였다. 이들을 체포하여 국문(鞠問)한 안악 군수이축은 이 사실을 황해도 감사한준(韓準)에게 고발하였다. 이때 이웃 고을의 재령 군수박충간(朴忠侃)과 신천 군수한응인(韓應寅)도 정여립 일당을 체포하여 국문하였다. 정여립의 무리가 황해도와 호남에서 동시에 서울로 들어와 대장 신립(申砬)과 병조판서를 살해하고, 병권을 장악하기로 했다는 보고를 받은 황해도 감사한준(韓準)은 안악군수이축(李軸), 재령군수박충간(朴忠侃), 신천군수한응인(韓應寅) 등과 연명하여 조정에 고변하였고, 1589년(선조 22) 10월 마침내 <정여립(鄭汝立) 옥사(獄事)>가 일어났다.

그해에 정여립 모반사건을 조정에 고변한 공으로 당하관(堂下官)에서 당상관(堂上官)인 종2품하 가선 대부(嘉善大夫)로 승품되고,[비문] 공조 참판(工曹參判)에 임명되었다.(『선조실록』 22년 12월 16일) 1590년(선조 23) 평난공신(平難功臣) 1등으로 완산군(完山君)에 봉해지고, [비문] 형조판서가 되었으며,(『선조실록』 23년 1월 16일) 1591년(선조 24) 의정부 우참찬(議政府右參贊)에 임명되었다.[비문]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에는 건의대장(建義大將)심수경(沈守慶)의 부장이 되어 충청도로 가서 의병을 지휘하였고, 1594년(선조 27) 진휼사가 되어 서울의 백성을 구휼하였다.[비문] 1597년(선조 30) 공조 판서(工曹判書)가 되었다가, 1598년(선조 31) 한성부 판윤(判尹)으로 전임되었다.(『선조실록』 30년 6월 6일),(『선조실록』 31년 8월 7일) 1601년(선조 34) 종1품하 숭정대부(崇政大夫)로 승품되고, 중추부 판사가 되었으며,(『선조실록』 34년 8월 28일) 1604년(선조 37) 종1품상 숭록대부(崇祿大夫)로 승품되었다.[비문] 1607년(선조 40) 70세가 되면서 치사(致仕)하고 조용히 은거하였다.

1611년(광해군 3) 완산부원군(完山府院君)에 봉해졌다. 1614년(광해군 6) 1월 8일, 집에서 돌아가니 향년 77세였는데, 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贈)되었다.[비문]

성품과 일화

용모는 평범하였으나, 성품이 곧고 순박하였다. 일생동안 뜻을 굳게 지켜 남에게 굽히지 않았으며, 시세(時勢)의 변천에 따라 마음을 바꾸지도 않았다. 남의 비위를 보면 마치 자신이 더럽혀 질것처럼 여겨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는 자들에 대하여 침을 뱉고 돌아서거나, 똑바로 쳐다보지 않았다. 집 대문을 닫고 방안에 들어앉아 조용히 글을 읽었으므로, 아무도 집안에 사람이 있는 줄 몰랐다. 성품이 낚시를 좋아하여 항상 낚시 도구를 가지고 다녔다.[비문]

이축이 태어나서 나이 4세가 되었을 때 어머니 남씨(南氏)가 돌아갔는데, 어릴 때 낚시를 좋아하여 항상 낚시 도구를 지니고 혼자서 물가로 돌아다녔다. 어머니를 일찍 여읜 아들을 불쌍히 여긴 아버지 극포군(極浦君)이희남(李希男)은 아들이 잘 자라주기만을 바랐을 뿐이었으므로 특별히 공부를 하라고 훈도(訓導)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이 12세 때부터 스스로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고, 학문에 뜻을 두고 유학을 열심히 공부하여, 1567년(명종 22)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고, 1576년(선조 9)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에 뽑혀서 들어갔다. 그 후, 30여 동안 벼슬살이를 하면서 형조판서와 공조판서와 한성부 판윤을 역임하고, 나이 70세가 되자 치사(致仕)하고 벼슬에서 물러나 조용히 은거하였다. 만년에 시(詩)를 좋아하고 글을 배웠으며, 바둑을 잘 두었다.[비문]

1588년(선조 21) 이축(李軸)이 안악 군수(安岳郡守)가 되었을 때, 안악의 변숭복(邊崇福)과 해주의 지함두(池涵斗) 등이 함께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하여, 무술을 단련하며,『정감록』의 <망이흥정설(亡李興鄭說)>을 퍼뜨리고 민심을 선동하였다. 안악 군수이축이 이들을 체포하여 국문(鞠問)하고, 황해도 감사한준(韓準)에게 이들을 고발하면서 마침내 <정여립(鄭汝立) 옥사(獄事)>가 일어났다.

<정여립 옥사>는 서인(西人)인 좌의정정철(鄭澈)이 위관(委官: 재판장)이 되어 다스리는 과정에서 <기축옥사(己丑獄死)>로 확대되어, 이후 3년 동안 이 옥사로 동인의 과격파 이발(李潑)을 비롯한 수많은 동인이 죽음을 당하였는데 그 수가 무려 1천명에 달하였다. <정여립 옥사>는 동인과 서인의 당파 싸움을 극도로 과열시켰기 때문에 서인이 동인을 제거하기 위해서 꾸며낸 옥사라고 하는 주장도 있다. 이때 안악 군수이축이 정여립 일당을 처음으로 체포하여 고발하였으나, 이웃 고을의 재령 군수박충간(朴忠侃)과 신천 군수한응인(韓應寅)도 정여립 일당을 체포하여 국문하였다. 그들은 이후 논공행상과정에서 모반자를 먼저 체포하였다고 서로 주장하였는데, 결국 평난공신(平難功臣)을 책봉할 때 그들이 이축보다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축은 조금도 이에 대하여 불평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그 아량에 감탄하였다. 이때 이축은 종2품하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품(陞品)되고 공조 참판(工曹參判)으로 승진되었는데, 실록에는 동인들이 이축에 대하여 비난한 글이 매우 많다.[비문]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과천현(果川縣) 광명동(廣明洞)에 있는데, 백사(白沙)이항복(李恒福)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있다.[비문] 완산부원군(完山府院君)이축(李軸)은 병이 위독해지자 자제(子弟)들에게 “오성(鰲城: 이항복) 대감이 어진 공경(公卿)들의 비명(碑銘)을 많이 지었다고 하니, 내가 죽거든 그의 글을 얻어서 묘비를 세워주면 좋겠다.’고 부탁하였다. 이에 자제들이 오성이항복에게 사람을 보내 비문을 써달라고 간청하였고, 그 청탁을 받은 이항복이 비명을 지었다고 한다.[비문]

부인 해주최씨(海州崔氏)는 최희경(崔希慶)의 딸인데, 자녀는 1녀를 낳았다. 딸은 참봉(參奉)유정(柳竫)에게 시집갔다. 아들이 없었으므로 조카 이응명(李應明)을 후사로 삼았는데, 양자 이응명은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현감(縣監)을 지냈다. 이응명은 3남 1녀를 낳았는데, 이우송(李友松)·이우백(李友栢)·이우매(李友梅)이다.[비문] 맏손자 이우송은 현감을 지냈다.[족보]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숙종실록(肅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백사집(白沙集)』
  • 『간이집(簡易集)』
  • 『고대일록(孤臺日錄)』
  • 『국조보감(國朝寶鑑)』
  • 『기언(記言)』
  • 『명재유고(明齋遺稿)』
  • 『미수기언(眉叟記言)』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월정집(月汀集)』
  • 『하담파적록(荷潭破寂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