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굉(李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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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41년(세종 23)~1516년(중종 11) = 76세]. 조선 중기 성종(成宗)~중종(中宗) 때의 문신. 개성유수(開城留守) 등을 지냈다. 자는 심원(深源)이고, 호는 귀래정(歸來亭)이다. 본관은 고성(固城)이며, 거주지는 안동(安東)이다. 아버지는 영산현감(行靈山縣監)을 지낸 이증(李增)이고, 어머니 경주 이씨(慶州李氏)는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를 지낸 이희(李暿)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좌의정을 지낸 철성부원군(鐵城府元君)이원(李原)이며, 증조할아버지는 고려 때 밀직부사(密直副使)를 지낸 이강(李岡)이다. 형조 판서(判書)이칙(李則)과 병조 참판(參判)이륙(李陸)의 사촌이자, 우의정윤호(尹壕)의 외사촌이기도 하다.

성종~중종 시대 활동

1465년(세조 11) 사마시(司馬試)의 진사과(進士科)에 합격하였다. 1480년(성종 11) 식년(式年) 문과(文科)의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40세였다. 그 해 어머니 상(喪)을 당하였고, 상례를 치르고 난 후 성균관(成均館) 전적(典籍)에 임명되었다. 이후 군위현감(軍威縣監)을 거쳐,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문학(文學)을 역임하였다. 1493년(성종 24) 정3품하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승품되어 당상관(堂上官)이 되었으며, 사간원(司諫院) 헌납(獻納)에 임명되었다가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으로 승진하였다.(『성종실록』 24년 1월 18일),(『성종실록』 24년 윤5월 8일) 1494년(성종 25) 충청도병마절도사(忠淸道兵馬節度使)에 임명되었다.(『성종실록』 25년 11월 16일)

연산군(燕山君)이 즉위한 후 공조 정랑(正郞)이 되었다가, 외방으로 나가기를 자청하여 청도군수(淸道郡守)에 임명되었다. 1499년(연산군 5) 청도군수의 임기가 찼으므로 조정으로 돌아와 사재감(司宰監) 첨정(僉正)을 거쳐 봉상시(奉常寺) 부정(副正)에 임명되었다. 1500년(연산군 6) 사헌부 집의(執義)가 되었고,(『연산군일기』 6년 5월 10일) 이후 예빈시(禮賓寺) 정(正)과 승문원(承文院) 판교(判校)를 역임하였다. 1503년(연산군 9)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품되었고, 이어 상주목사(尙州牧使)에 임명되었다.

한편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戊午史禍)> 때,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었던 이굉의 조카 이주(李胄)가 <김종직(金宗直)의 옥사>에 연루되어 진도로 귀양 갔다.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일어나면서 이주는 김굉필(金宏弼) 등과 함께 사형되었는데, 이때 이굉도 <김굉필(金宏弼)의 옥사>에 연루되면서 영해(寧海)로 귀양 갔다.

1506년(중종 1)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중종이 왕위에 오른 뒤 병조 참지(參知)에 기용되었다. 이듬해인 1507년(중종 2) 종2품하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품되었고, 충청도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으나 아버지 봉양을 위해 사직하자 경상좌도수군절도사(慶尙左道水軍節度使)로 체임되었다. 1509년(중종 4년) 아버지 상(喪)을 당하였고, 상례(喪禮)를 마친 후 중추부(中樞府) 동지사(同知事)를 거쳐 1511년(중종 6)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에 임명되었다.(『중종실록』 6년 8월 4일) 1512년(중종 7) 개성유수(開城留守)가 되었으나,(『중종실록』 7년 3월 13일) 이듬해인 1513년(중종 8)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사직하고 고향인 안동으로 귀향하여 귀래정(歸來亭)을 지어 풍류를 즐겼다.(『중종실록』 8년 3월 8일) 1516년(중종 11) 4월 6일 병으로 집에서 세상을 떠나니, 나이가 76세였다.

성품과 일화

이굉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성품이 매우 침착하고 과묵하였다. 또한 관대하고 후덕하여 부모 형제 뿐 아니라, 벗과 다른 사람에게도 마음과 예의를 다하였다.

이굉이 지은 귀래정은 경상북도 안동시 정상동 777번지에 위치하고 있는데, 1985년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7호로 지정되었다. 고성이씨(固城李氏) 안동 입향조(入鄕祖)인 아버지 이증(李增)이 이곳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먼저 터전을 잡았고, 그의 둘째 아들인 이굉이 1513년(중종 8) 벼슬에서 물러난 후, 경상북도 안동으로 귀향하여 부성(府城) 건너편 낙동강이 합수되는 경관이 빼어난 곳에 정자를 짓고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의 뜻을 취해 ‘귀래정’이라고 하였다.

이중환의 『택리지(擇里志)』에서는 안동의 많은 정자 가운데 귀래정·임청각(臨淸閣)·군자정(君子亭)·하회(河回)의 옥연정(玉淵精)을 으뜸이라고 하였다. 이 가운데 임청각은 이증(李增)의 셋째 아들이자, 이굉의 동생인 이명(李洺)이 지은 것이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상북도 안동 귀래정의 남쪽 기슭에 있고, 황효헌(黃孝獻)이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있다.

부인 진천 송씨(鎭川宋氏)는 중추부 첨지사(僉知事)송상(宋裳)의 딸인데, 자녀는 1녀를 두었다. 장녀는 함양(咸陽)안서(安㥠)의 처가 되었다.

측실(側室)에서 2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 이효측(李孝側)은 전의감(典醫監) 봉사(奉事)를 지냈으며, 차남 이은중(李恩重)은 일찍 죽었다. 차녀는 봉사변형손(卞亨孫)에게 출가하고, 3녀는 영의정성희안(成希顔)에게 시집갔다.

참고문헌

  • 『성종실록(成宗實錄)』
  •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 『중종실록(中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대산집(大山集)』
  • 『미수기언(眉叟記言)』
  • 『상촌집(象村集)』
  • 『택당집(澤堂集)』
  • 『뇌계집(㵢谿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