융문당(隆文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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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대 경복궁 후원에 조성한 경무대의 중심 전각.

개설

고종대에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창덕궁 후원의 춘당대(春塘臺)와 같은 기능으로 사용하기 위해 신무문(神武門) 북쪽에 넓은 공간을 확보하여 이곳을 경무대(景武臺)라고 했다. 경무대의 중심 건물은 융문당과 융무당(隆武堂)이고 행각으로는 춘안당(春安堂)이 있다. 융문당의 서쪽에는 15칸 규모의 수궁(守宮)이 있다. 융문당의 북쪽으로 깊숙한 곳에는 왕의 휴식을 위한 곳으로 사모정인 옥련정(玉蓮亭), 온돌방과 누마루, 대청으로 구성된 오운각(五雲閣), 행각인 벽화실(碧華室) 등의 소규모 건물들이 있다. 옥련정의 서쪽 외궁장에는 현무문(玄武門)이 있다.

위치 및 용도

신무문 북쪽 경무대의 북단에 위치한다. 융문당은 경무대의 중심 전각으로써 이곳에서는 왕이 친림하는 최종 시험인 문무과전시(文武科殿試)를 시행하거나 군대 사열, 망배례 등을 행하였다. 융문당 서쪽에는 춘안당이 있는데, 고종 때 대보단제(大報壇祭)를 위하여 왕은 융문당에서 재숙(齋宿)하였고 세자는 춘안당에서 재숙하였다(『고종실록』 8년 3월 7일). 춘안당에는 왕실의 서책을 보관하기도 하였다.

변천 및 현황

경복궁 중건이 끝나갈 무렵인 1868년(고종 5) 10월에 건립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융문당은 융무당과 함께 일본 불교 종단인 진언종(眞言宗)에 무상으로 대여되었고 헐린 재목은 대략 1928년 8월 이후 당시 서울특별시 한강통(漢江通)에 있던 일본 사찰인 고야산(高野山) 용광사(龍光寺)의 건물이 되었다. 이 건물들은 원불교(圓佛敎) 서울 교당으로 2006년까지 사용되었으며 현재는 전라남도 영광의 원불교 영산성지(靈山聖地)로 이건되었다. 옥련정, 오운각, 벽화실 등은 일제 강점기에 없어졌다.

형태

융문당은 이익공 형식의 공포에 지붕마루에 양상도회(樑上塗灰)를 하여 권위를 높였다.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대청이 3칸이고 양 옆에 방이 있다. 단 차이가 있는 넓은 월대를 갖추고 있다.

융문당의 뒤쪽으로는 담장을 둘렀는데, 동쪽 담장은 융무당까지 연결되어 경무대 영역의 범위를 한정 짓고 있다. 이 담장에 삼춘문(三春門)이 있고, 융문당 후면 쪽에는 경무문(景武門)과 용무문(用武門), 융문당의 동쪽 사이 담에는 문안문(文安門)과 경춘문, 춘안당 쪽의 사이 담에는 무숙문(武肅門), 소춘문(小春門)이 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궁궐지(宮闕志)』
  • 『궁궐지(宮闕誌)』「북궐도형(北闕圖形)」
  • 대통령경호실 편, 『청와대와 주변의 역사·문화유산』, 대통령경호실,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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