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치(李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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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04년(연산군 10)∼1550년(명종 5) = 47세]. 조선 중기 중종(中宗)~명종(明宗) 때의 문신. 사간원(司諫院) 헌납(獻納) 등을 지냈다. 자는 가원(可遠)이고, 호는 매서(梅墅)이다. 본관은 덕수(德水)이며,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적성현감(積城縣監)이자하(李自夏)이고, 어머니 전의 이씨(全義李氏)는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이계복(李繼福)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성균관 생원(生員) 이찬(李璨)이며, 증조할아버지는 황주판관(黃州判官)이효종(李孝宗)이다. 김평군(金平君)이계복(李繼福)의 외손자이자, 성균관 사예(司藝)이서(李序)의 할아버지이기도 하다. 판서(判書)박계현(朴啓賢)과 절친한 사이였다. <충주옥사>와 관련되어 처형되었다.

중종~명종 시대 활동

1522년(중종 17) 사마시(司馬試)의 생원과(生員科)로 합격하였고, 18년 뒤인 1540년(중종 35) 식년(式年) 문과(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37세였다. 바로 성균관 학유(學諭)로 보임되었고, 박사(博士)를 거쳐 호조 좌랑(佐郞)에 임명되었다.

1548년(명종 3) 사간원 헌납이 되었다.(『명종실록』 3년 3월 14일) 이때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에서는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일으킨 이기(李芑)가 권력을 농단하고 전횡을 한다는 이유로 함께 이기(李芑)의 죄를 탄핵하였다. 이때 이치는 “이기는 새로 임명하는 벼슬아치를 이조에서 임명하도록 하지 않고, 참봉(參奉)·봉사(奉事)·첨사(僉使)·만호(萬戶)까지도 반드시 그의 말을 듣고 추천하여 임명하도록 하며 모든 육조(六曹)의 공사(公事)도 반드시 자기에게 물어 보고 시행하도록 합니다. 이에 육조는 어떤 공사를 하고 싶어도 삼공이 허가하지 않을까 걱정하여 중지하는 일이 많다고 합니다.” 라고 하였다.(『명종실록』 3년 4월 19일) 이후에도 탄핵이 이어지자 이기는 이치에게 앙심을 품었다. 이치는 또한 외척(外戚)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은 일이라고 비판하였고, 이 일로 외척 이기와 윤원형(尹元衡)으로부터 원망을 사게 되었다. 결국 소윤(少尹)의 윤원형과 이기에 의하여, 이치는 충주목사(忠州牧使)로 좌천되었다.

1549년(명종 4) <충주옥사(忠州獄事)>가 일어나면서 충주목사이치는 이홍남(李洪男)의 송사(訟事)를 정직하게 처리하려고 하다가, 이기의 사주를 받은 이무강(李無彊)에 의하여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이해(李瀣)와 함께 모반 대역 죄인으로 몰려 투옥된 후 장살(杖殺)되었다.(『명종실록』 5년 8월 4일),(『명종실록』 5년 8월 6일),(『명종실록』 5년 9월 2일),(『명종실록』 5년 9월 10일) 1550년(명종 5) 8월 10일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 47세였다.

충주 옥사

1547년(명종 2) 정언각(鄭彦慤)이 양재역(良才驛)에 문정대비(文定大妃)를 비난하는 벽서(壁書)가 나붙었다고 고변(告變)한 <양재역 벽서 사건>이 발생하였다. 윤원형의 소윤 일파는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살아남은 사림파(士林派)의 잔당을 그 배후로 지목하여, 송인수(宋仁壽)·백인걸(白仁傑)·이약빙(李若氷) 등을 체포하여 심문하였다. 이후 송인수·이약빙 등은 처형되었고, 백인걸과 이약빙의 형인 이약수(李若水) 등은 먼 변방으로 유배시켰다. 윤임(尹任)과 인척 관계였던 이약빙의 두 아들 이홍남(李洪男)과 이홍윤(李洪胤)도 이에 연루되어 각각 귀양을 갔다. 대윤(大尹)인 윤임의 사위였던 작은 아들 이홍윤(李洪胤)은 충청도 충주에서 귀양살이를 하였는데, 항상 소윤(少尹)에 대한 원망과 분개로 비난을 거듭하였다. 반면 강원도 영월에서 귀양살이를 하던 형 이홍남은 자신의 처지가 동생 때문이라고 생각하여 이홍윤을 원망하였으므로 서로 사이가 나빴다. 이들 형제가 아버지 이약빙을 장사 지낸 곳은 낮은 땅이었는데, 동생 이홍윤이 술사(術士)를 통해 새로 명당자리를 얻고 난 후 형 이홍남에게 “장차 왕후장상이 나올 산이다.”라면서 편지를 보내 자랑하였다. 그러나 형 이홍남은 의정부 사인(舍人)정유길(鄭惟吉)과 홍문관(弘文館) 교리(校理)원호변(元虎變)을 통하여 고변(告變)하기를, “동생 이홍윤이 함창(咸昌)에 사는 술사 배광의(裵光義)와 서로 왕래하면서 명당자리를 찾아내고, 조정에 있는 모든 대신들의 운명을 점쳤습니다. 그가 길흉을 예언하기를 ‘연산군(燕山君) 때 사람을 지극히 많이 죽이더니, 마침내 반정(反正)이 일어나서 쫓겨났는데 지금 임금인들 어찌 오래도록 그 자리를 지키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라고 하면서 그 증거로 지방 토호들의 향회(鄕會) 문서를 제출하였다.

이에 1549년(명종 4) 4월 이약빙의 작은 아들 이홍윤을 잡아들여 의금부에서 심문을 하였다. 이때 영의정이기는 이홍윤이 윤임의 사위라는 말을 듣고, 난언(亂言)을 모반 대역죄로 확대시켰다. 이에 확실한 증거도 없이 충주의 토호(土豪)들을 모조리 잡아들이면서 충주 한 고을이 모두 이 옥사에 연루되게 되었다. 이 일로 충주의 토호 강유선(康惟善)·이이(李彝)·이규(李揆)·안세장(安世章)·최대립(崔大立)·최대림(崔大臨)·김의순(金義淳) 등 33명이 모두 처형되었다. 이때 문정대비는 격분하여 “충주에서 역적들이 반역 모의를 계획하면서 그 명부까지 만들었는데도, 그 고을 사람 중에서 한 사람도 사전에 고변한 사람이 없었으니, 이것은 인심이 완악하여 군신의 의리를 모르기 때문이다.”라고 하고, 충주를 유신현(維新縣)으로 강등한 후 충청도를 청홍도(淸洪道)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다.(『명종실록』 4년 5월 21일) 또 문정대비는 영월에 있던 이홍남을 특별히 대궐로 불러 “대의를 위하여 형제의 정의도 무시하였다.”라고 칭찬하면서 친히 술을 따라주었다. 이홍남이 상복을 입은 채 술에 취하여 건들거리면서 대궐을 나오는 것을 보고 모두가 통분하였는데, 이홍남은 그날로 공조 참의(參議)로 발탁되었다.[<『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권10]

1550년(명종 5) 충주에 살던 최하손(崔賀孫)이란 백성이 <이홍남의 고변>을 보고, 충주 아전들의 향회 문서를 훔쳐 서울에 올라가서 고변하여 공을 세우고자 하였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이를 알고 잡아서 관에 고발하였다. 유신현감(維新縣監)이던 이치(李致)가 이를 청홍도관찰사(淸洪道觀察使)이해(李瀣)에게 보고한 끝에 마침내 최하손은 심문을 당하였다. 청홍도관찰사이해는 보고를 들은 후 죄인을 엄하게 치죄하도록 명하였는데, 현감이치가 고신(拷訊)하는 과정에서 최하손이 곤장을 맞고 옥에서 죽었다. 이에 앞서 이홍남은 동생 이홍윤이 죽은 뒤 아버지 이약빙의 몰수당한 재산을 찾기 위하여 상복을 입은 채 충주 관가로 와서 아버지의 재산을 돌려달라고 아전과 다투었다. 이홍남의 행위를 본 유신현감이치는 그를 천박하게 여겨 준엄한 말로 호통을 쳐서 내쫓아버렸다. 이때 이홍남은 이치에게 크게 앙심을 품고 돌아섰다. 한편 청홍도관찰사이해는 영의정이기와 사이가 나빴는데, 이해가 사헌부 대사헌(大司憲)으로 있을 때 이기가 우의정에 임용되는 것을 반대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1550년(명종 5) 8월 이홍남이 영의정이기의 심복인 사간원 사간(司諫)이무강(李無彊)을 통하여 “이해와 이치가 최하손을 죽여 그 입을 막음으로써 역적들을 옹호하려고 하였습니다.”라고 무고(誣告)하였다. 이에 유신현감이치와 청홍도관찰사이해가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였다. 어떤 형리가 감사이해에게 귓속말로 “허위로 자백하고 현감에게 죄를 돌리면, 죽음을 면할 수 있습니다.”하고 권하자, 이해가 탄식하며, “내가 지은 죄도 없이 어찌 허위로 자백하면서 까지 살기를 도모하겠느냐.” 하고 거절하였다. 이해는 스스로 상소문을 지어 그의 원통함을 임금에게 호소하려고 하였으나, 옥리(獄吏)들이 영의정이기를 두려워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이때 사간원 사간이무강 등은 “관찰사이해와 현감이치가 제 마음대로 문서를 꾸며서, 유신현 지방 역적들의 토지와 노예와 재산을 본임자에게 돌려주었습니다.”라고 무고하였다.

현감이치는 오래도록 옥중에 구속되어 있었는데, 곤장을 죽도록 맞으면서도 한 번도 말을 바꾼 적이 없었다. 임금이 두 사람에게 사형을 감해서 귀양을 보내라고 명하였으나, 현감이치는 이미 곤장을 맞고 기절하여 다시 소생하지 못하였다. 관찰사이해는 장형을 받았으나 죽지는 않았으므로 함경도 갑산(甲山)으로 유배되었다. 이후 양사(兩司)에서 6~7번이나 이해를 형률대로 다스리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해는 갑산으로 귀양 가는 도중 양주(楊州)에 이르러 세상을 떠났는데, 이때가 마침 한창 더운 여름이었으므로 시체가 썩어서 문드러졌다. 이처럼 이해와 이치가 참혹하게 곤장을 맞아 죽은 것은 윤원형이 영의정이기의 주장에 따라 문정대비를 부추겨서, 두 사람을 반드시 곤장으로 때려죽이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이때 이황(李滉)은 형 이해의 참혹한 죽음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아, 평생 벼슬하기를 꺼려하여, 고향 안동(安東)으로 내려가 도산서원(陶山書院)을 세우고 은거하며 후진을 양성하는 데에 힘썼다.[『연려실기술』 권10]

성품과 일화

이치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얼굴 모습이 준수(俊秀)하고 의젓하며, 성품이 강직하고 엄격하였다. 사람들이 씩씩하고 의젓한 모습을 보면 그 속에 확고한 신념이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효성스럽고 우애가 있으며, 정직하고 성실하였으므로, 집에 있을 때나 관에 있을 때 행동에 아무런 잘못이 없었으고, 재주는 막힘이 없었다. 남들이 어려워하는 천문학(天文學)과 공예(工藝) 등에 남다른 재주가 있었는데, 스스로 성력(星曆)을 추보(推步)하는 것에서부터 백공기예(百工技藝)에 이르기까지 모두 통달하였다. 또 술을 잘 마셨지만, 많이 마시더라도 술에 취하여 흩어진 행동[酒亂]을 하지는 않았다.

관청에서 정사를 볼 때 정직하게 일을 처리하였으며 신념에 흔들림이 없었다. 그의 성격은 악을 미워하고 남의 허물을 용납하지 못하였는데, 끝내 무고를 당하여 비명(非命)에 세상을 떠났다. 1545년(명종 즉위년)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파직되었을 때, 아예 벼슬을 그만두고 별장이 있는 인천(仁川)의 농장으로 돌아가서 평생 농사를 짓고 유일(遺逸)로 살려고 하였으나, 늙은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하여 벼슬길을 떠나지 못하였다. 결국 을사사화를 일으킨 소윤의 2대 원흉(元兇) 윤원형과 이기에 의하여 무고를 당하여 옥사(獄死)하게 되었으므로, 귀향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는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선영(先塋)에서 여묘살이 하던 중, 이홍남 일당의 무고로 인하여 체포당한 후 수감되었는데, 안색이 조금도 변하지 않았고, 부인에게 가사(家事)에 대하여 한마디 부탁도 하지 않았다. 윤원형이 옥사를 심문할 때 혹독하게 장신(杖訊)하여 반드시 그를 때려죽이려고 하였다. 이치는 억울한 사정을 명종에게 상소하려고 하였으나, 윤원형과 이기가 가로막는 바람에 임금에게 전달되지 못하였다. 당시 명종의 나이는 17세였으므로 문정대비가 수렴청정(垂簾聽政)하던 때여서 그의 상소가 명종에게 전달되었다고 하더라도 대비의 동생인 윤원형에 의하여 파기되었을 것이다. 이치가 옥사한지 3년 만에 명종이 20세가 되어 친정(親政)을 하게 되자, 명종은 외삼촌 윤원형을 황해도 강음(江陰)으로 내쫓았고, 결국 윤원형은 자결하였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 장단부(長湍府) 홍릉동(弘陵洞)의 선영에 있는데, 이이(李珥)가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있다.[비문]

부인 성주 이씨(星州李氏)는 첨정(僉正)이인수(李麟壽)의 딸인데, 자녀는 2남 3녀를 두었다. 장남 이사성(李師聖)은 문과에 급제하여, 사옹원(司饔院) 정(正)을 지냈고, 차남 이경성(李景聖)은 음직(蔭職)으로 함열현감(咸悅縣監)을 지냈다. 장녀는 사인(士人) 권숙(權俶)에게, 차녀는 사인(士人) 이신언(李愼言)에게, 3녀는 사인(士人) 정석희(鄭錫禧)에게 각각 시집갔다. 손자 이서(李序)는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사예(司藝)를 지냈다.

부인 이씨(李氏)는 세종 때 영의정성산부원군(星山府院君)이직(李稷)의 후손으로, 성품이 단정하고 방정하며 여자의 법도를 닦고 갖추어 2남 3녀의 자녀를 모두 잘 길러냈다. 또 도량이 남자처럼 크고 넓어서 남편 이치가 옥사한 뒤에도 가업(家業)을 잘 유지하고 키워내 재산이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1575년(선조 8) 1월 15일 병으로 세상을 떠나니, 나이가 71세였다. 그해 3월 남편의 묘소에 합장되었다.

참고문헌

  • 『명종실록(明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성호전집(星湖全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퇴계집(退溪集)』
  • 『기재잡기(寄齋雜記)』
  • 『온계일고(溫溪逸稿)』
  • 『사계유고(沙溪遺稿)』
  • 『을사전문록(乙巳傳聞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