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척연(李惕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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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91년(선조 24)∼1663년(현종 4) = 73세]. 조선 후기 인조~현종 때의 문신. 유학자. 행직(行職)은 승정원 승지(承旨), 예조 참의(禮曹參議)이고, 증직(贈職)은 예조 판서(禮曹判書)이다. 자(字)는 성오(省吾)이고, 호(號)는 동이당(同異堂)·동포(東圃)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거주지는 서울 동교(東郊)이다. 아버지는 현감(縣監)이구(李球)이고, 어머니 순천김씨(順天金氏)는 김여흘(金汝屹)의 딸이다. 덕천군(德泉君 : 정종의 제 10왕자)의 6대손이며, 학성군(鶴城君)이연정(李連丁)의 현손이다. 우암(尤庵)송시열(宋時烈)과 교유하였다.

인조 때 과거에 급제하여, 사간원 정언(正言)을 거쳐 사헌부 지평(持平)·장령(掌令)이 되어 대간(臺諫)으로 활동하였다. 효종 때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었고, 현종 때 형조·예조의 참의(參議) 등을 역임하였다. 성리학(性理學)에 조예가 깊었는데, ‘기일원론(氣一元論)’ 중에서 특히 ‘심무체론(心無體論)’을 주장하였다.

인조 시대 활동

1627년(인조 5) 사마시(司馬試) 진사과(進士科)에 합격하고, 그 다음해 1628년(인조 6) 별시(別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38세였다.[『국조방목(國朝榜目)』] 바로 승문원(承文院) 부정자(副正字)에 보임되었다가, 승정원 가(假) 주서(注書)에 임명되었는데, 글씨를 잘 쓴다고 하여, 기사관(記事官)으로 뽑혀서 경연(經筵)에 자주 입시(入侍)하였다.[『승정원일기』인조 7년 5월 2일] 1629년(인조 7) 예문관 검열(檢閱)이 되었는데, 그해 6월에 예문관 관리들에게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을 가지고 시험을 보여 취재(取才)할 때, 송국택(宋國澤)은 약(略: 중등)을 맞고, 이척연(李惕然)은 조(粗: 하등)를 맞았다.[『승정원일기』인조 7년 6월 11일]

1630년(인조 8) 예문관 대교(待敎)로 승진되었다가, 성균관 전적(典籍)으로 전임되었고, 뒤이어 호조·예조·병조의 좌랑(佐郞)을 거쳐, 사간원 정언(正言)이 되었다.[『승정원일기』인조 8년 12월 4일] 예조 좌랑일 때, 경기 경안역(慶安驛)에서 함부로 역마(驛馬)를 이용하였다고 하여, 그해 7월에 탄핵을 당하였다.[『승정원일기』인조 8년 7월 26일] 그 뒤에 충청도 도사(都事)로 나갔다가, 성균관 직강(直講)을 거쳐, 세자시강원 문학(文學)이 되었는데, 항상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였다.[비문] 그 사이에 문과(文科)의 참시관(參試官)이 되었는데, 고관(考官)을 도와 훌륭한 인재를 뽑았다. 1634년(인조 12) 사헌부 지평(持平)이 되었을 때, 이조 판서최명길(崔鳴吉)이 강학년(姜鶴年)을 잘못 추천한 죄를 논박하다가, 파직 당하였다.(『인조실록』 12년 12월 7일) 1635년(인조 13) 충청도 직산 현감(稷山縣監)으로 나갔는데, 반대파 사관(史官)들이 “이척연은 일찍이 지평으로 있을 때, 이조 판서최명길이 사람을 잘못 추천한 과실을 논박하였으나, 다시 그의 문 앞에 가서 벼슬을 구걸하였다.”고 비난하였다.(『인조실록』 13년 3월 5일)

1636년(인조 14년) 12월에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났을 때, 직산 현감으로 재임하던 이척연은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청나라 오랑캐 군사와 싸우고 있는 임금을 생각하여 잠도 자지 못하고 음식도 먹지 않고, 눈물을 흘렸다. 1637년(인조 15년) 1월 30일, 인조가 삼전도(三田渡)에서 청나라 태종에게 항복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이척연은 너무나 놀라서 기절하였는데, 깨어난 후 3일 동안 단식하였다. 임기가 끝나자, 조정으로 들어와 사헌부 지평(持平)이 되어, 춘추관(春秋館) 사관(史官)을 겸임하였다. 이때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를 편수하는 데에 참여하였다. 1641년(인조 19) 사헌부 장령(掌令)으로 승진하였는데,[『승정원일기』인조 19년 3월 25일] 다시 춘추관(春秋館) 사관(史官)을 겸임하였다.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 보관한 인조의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가 병란으로 유실된 것이 상당히 많았으므로, 춘추관 사관(史官)을 18명이나 증원하여, 인조의『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중에서 누락된 부분을 사관(史館)의 비장된 기록이나 민간의 야사(野史)자료를 가지고 보충하여 편찬하였는데,(『인조실록』 19년 7월 13일) 장령이척연도 사관으로 뽑혀서 이에 참여하였다.

1642년(인조 20) 성균관 직강(直講)이 되었다가, 다시 사헌부 장령(掌令)이 되었다. 부모를 봉양하기 위하여 자청하여 경상도 인동 부사(仁同府使)로 나갔으나, 연달아 부모의 상을 당하여, 선산에서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였다. 인조가 삼전도(三田渡)에서 치욕을 당한 이후, 그는 서울 동교(東郊)에 은거하려고 하였으므로, 부모의 상례를 끝난 다음에도 번번이 임금의 소명(召命)을 사양하였다.[비문] 1642년(인조 20) 다시 사헌부 장령에 임명되었으나,(『인조실록』 20년 4월 8일) 벼슬을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1646년(인조 24) 오랫동안 동교(東郊)에서 은거하다가, 마지못하여 세자시강원 필선(弼善)으로 부임하여, 춘추관 편수관(編修官)을 겸임하였는데, 다시 사헌부 장령(掌令)에 임명되었다.[『승정원일기』인조 24년 5월 2일] 1648년(인조 26) 부호군(副護軍)이 되었다가, 군자감 정(軍資監正)이 되어, 사헌부 장령(掌令)을 겸임하였다. 사신(使臣)의 서장관(書狀官)에 임명되어 청나라 서울 연경(燕京)에 갔다가 돌아왔다. 그해 10월에 경상도 선산 부사(善山府使)에 임명되면서 인조에게 하직 인사를 드렸는데, 인조가 다음해인 1649년(인조 27) 5월에 승하(昇遐)하였으므로, 이것이 그의 마지막 인사가 되었다.[『승정원일기』인조 26년 10월 22일]

효종~현종 시대 활동

효종이 즉위하자, 경연관(經筵官)에 임명되었는데, 경연(經筵)에서 시강(侍講)할 때, 경전(經典)의 뜻을 강론하다가, 제왕(帝王)의 학문하는 요체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하니, 효종이 그의 제왕학(帝王學)에 대한 이론에 대하여 놀라워하며 경청(傾聽)하였다. 1651년(효종 2) 형조 참의(刑曹參議)에 임명되었는데, 그가 1652년(효종 3) 소를 보호하기 위한 우금(牛禁: 소도살 금지)의 법을 강력히 시행하자, 효종의 부마인 익평위(益平尉)홍득기(洪得箕)의 궁노(宮奴)가 이척연의 집으로 찾아가 난동을 부리는 사건이 벌어졌다.(『효종실록』 3년 1월 12일) 형조에서 부마의 처벌을 요구하자, 효종은 그 궁노를 처벌하는 한편, 이척연을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하여, 임금의 측근으로 삼았다. 그러나 승지이척연이 임금의 전지(傳旨)를 제대로 받들지 않았다고 하여 파면되었다.(『효종실록』 3년 3월 3일) 그러나 이척연은 복역(覆逆: 임금의 뜻을 거스르면서 다시 임금에게 아뢰는 것)하면서까지, 임금의 잘못된 명령을 고치려고 완고하고 간곡하게 충간(忠諫)하였기 때문이었다.[비문]

1653년(효종 4) 효종이 대사헌(大司憲)민응형(閔應亨) 등의 직언(直言)에 노하여, 이들을 옥(獄)에다 가두고 치죄(治罪)하려고 하니, 승지이척연이 불가하다고 고집하며, 계본(啓本)을 저녁때부터 다음날 아침에 해가 뜰 때까지 다섯 차례나 올리지 않았는데, 효종이 승지이척연 때문에 마침내 노기를 거두고 민응형을 인견(引見)하고 위로하여 돌려보냈다.[비문] 그 뒤에 외직으로 나가서 안변 부사(安邊府使)·안동 부사(安東府使)가 되었고, 조정으로 들어와서 호조 참의(戶曹參議)·장례원(掌隸院) 판결사(判決事)를 역임하였다. 안변 부사로 있을 때, 큰 흉년을 만났는데, 굶주리는 백성들을 진휼(賑恤)하여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구하였다. 내직으로 들어와서 병조·형조·예조의 참의(參議)를 지냈고, 다시 외직으로 나가서 홍주 목사(洪州牧使)·춘천 부사(春川府使)를 역임하였다. 춘천 부사로 있을 때, 세 번이나 조정으로 들어와 형조 참의의 업무를 아울러 처리하였다. 1656년(효종 7) 효종이 다시 이척연을 승지로 임명하여,(『효종실록』 7년 8월 9일) 측근에 두고 정사를 자문하였다.

1659년(현종 즉위년) 다시 형조 참의가 되었으나, 사헌부에서 형조 참의이척연이 소를 도살한 사람들을 엄하게 처벌하지 않고 속전(贖錢)을 받고 석방시켰다고 탄핵하면서, 파직되었다.(『현종실록』 즉위년 6월 2일) 곧 다시 승지로 발탁되었다가, 예조 참의로 전임되었다.(『현종개수실록』 1년 11월 18일) 현종이 즉위하면서 여러 차례 근시(近侍: 승지)에 임명되었으나, 이척연은 나이가 70세가 되었다고 치사(致仕)하였다. 그때 그는 모든 벼슬을 사양하고, 서울의 동교(東郊)로 돌아와 ‘동이당(同異堂)’이라는 서실(書室)을 지은 후, ‘동이당’을 자신의 호(號)로 삼았는데, 만년에 이곳에 은거하며 오로지 주역(周易)만을 연구하였고, 대궐에 들어가는 일이 드물었다. 1663년(현종 4) 8월 11일, 한강 가에 있는 동교(東郊)의 우사(寓舍)에서 노병(老病)으로 돌아가니, 향년 73세였다.[비문]

이척연은 성리학(性理學)에 조예가 깊었는데, 서인(西人)의 ‘기일원론(氣一元論)’을 지지하였고, 특히 ‘심무체론(心無體論)’을 주장하였다. 『주역(周易)』의 ‘상화하택(上火下澤) 상(象)’을 본떠서 그의 서실(書室) 이름을 ‘동이당(同異堂)’이라고 지었다. 저서로는 『보곤론(補袞論)』 2권과 『상례요람(喪禮要覽)』 1권 등이 있다.

성품과 일화

성품이 정직하고 청렴하여, 항상 올바르게 행동하고 누구에게도 아첨하지 않았다. 또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젊었을 때부터 아버지의 훈계를 받들며, “만약 혹시라도 아버지 훈계를 잊으면, 나는 아들이 아니다.” 하고 스스로 다짐했으므로, 아버지 말씀을 가슴에 새겨 두고, 끝까지 실천하였다. 오로지 부모의 뜻을 받들어 봉양을 다하려고 재물을 아끼지 않았으므로, 일찍이 창고에 사재(私財)를 쌓아둔 적이 없었다. 일찍이 그의 효성에 감동한 누군가가 빈 창고에 물건을 가득 채워 놓은 기이한 일도 있었다. 집에 있을 때에는 옛 현인(賢人)들의 행적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이 행동하였고, 관에 있을 때에는 옛 성현(聖賢)의 말씀을 가지고 임금에게 직간(直諫)하였는데, 이것은 그가 일찍이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글을 읽고 성리학의 이론을 몸소 실천하였기 때문이었다.

이척연은 일찍이 효종에게 하늘과 땅과 사람이 하나라는 설(說)을 설파하였으며, 임금은 반드시 보고 듣는 것[視聽]과 말하고 행동하는 것[言動]을 삼가 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형조(刑曹)에 있을 때에는 임금에게 형벌을 삼가고 죄인을 불쌍하게 여겨야 한다고 적극 주장하였는데, 효종이 모두 가납(嘉納)하였다. 조정에 입조(立朝)한 지 거의 40년이 되었으나, 몸가짐이 시종 청렴(淸廉)하고 근신(勤愼)하였으며, 외직으로 나가서 군읍(郡邑)을 다스릴 때에는 선정을 베풀었으므로, 그가 부임하는 고을마다 고을의 아전과 백성들이 반드시 송덕비(頌德碑)를 세워서 그의 덕(德)을 추모하였다.[비문]

밖으로 보이는 행동은 간결하고 조용하였으나, 속마음은 단단하고 태평하였다. 사물에 대한 욕심이 없었으므로 즐기는 오락이나 좋아하는 기호(嗜好)가 별로 없었는데, 오직 의(義)를 생각하고 선(善)을 좋아하여 시종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책을 읽다가 옛날의 교훈(敎訓) 가운데 자기 자신에게 절실한 구절을 발견하면, 반드시 좌우(座右)의 벽에 써서 붙여두고 아침저녁으로 읽으며 자신을 경계하고 반성하였다. 그러므로 평생을 즐겁게 살면서 일찍이 태만(怠慢)한 행동을 보인 적이 한 번도 없었고, 그의 입으로 비루한 말을 한 마디도 한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잘난 체하며 남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았고, 언제나 겸손한 태도로 남과 사귀었지만, 명예를 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세상에서 그를 아는 사람이 드물었다.[비문]

1634년(인조 12) 3월, 사헌부 지평이척연이 인조에게 역적 이탁(李倬)을 속히 처형하도록 청하였다.[『승정원일기』인조 12년 3월 21일] 그 전해에 종친인 금원령(錦原令) 이탁(李倬)이 술에 취하여 ‘하늘의 뜻에 응하고 백성의 의사에 순종하여 인성(仁城)이 나왔다.’라고 노래를 하였는데, 인성(仁城)은 <이괄의 난> 때 이괄이 추대하려던 선조의 제 7왕자 인성군(仁城君)이공(李珙)을 말한다. 인성군은 이미 처형되었으나, 그를 추대하려던 상황을 묘사한 노래가 10여 년이 지난 뒤에도 민간에서 널리 유행하였다. <인조반정> 이후에 반란과 호란으로 사회가 안정되지 못하였으므로, 지평이척연은 이탁의 처형을 강력히 요청하였는데, 이탁과 함께 노래를 불렀던 사람들까지 모두 처형되었다.(『인조실록』 11년 12월 17일)

1652년(효종 3) 1월, 형조 참의이척연(李惕然)이 소를 보호하기 위하여 우금(牛禁: 소도살 금지)의 법을 강력히 시행하였는데, 이에 불만을 품은 효종의 부마 익평위(益平尉)홍득기(洪得箕)의 궁노(宮奴)가 그의 집에 가서 난동을 부렸다. 이때 형조에서는 효종에게 “익평위홍득기의 궁노(宮奴)가 우금(牛禁)의 법을 범하고 소를 잡다가, 이를 단속한 관리에게 제지당하자 그를 마구 때렸으며, 또 홍득기는 궁노를 이끌고 형조 참의이척연의 집으로 가서 난동을 부렸으니, 이는 예부터 지금까지 없었던 변고입니다. 궁노를 엄하게 다스려 법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풍조를 징계하소서.” 하고 아뢰니, 효종은 “난동을 부린 궁노를 색출하여 죄를 다스리라.”고 하였다.(『효종실록』 3년 1월 12일) 익평위홍득기는 효종의 부마(駙馬)로서 효종의 둘째딸 숙안공주(淑安公州)와 혼인하였다. 당시 나라에서는 소를 보호하기 위하여 민간에서 소를 함부로 도살하는 것을 금지하였는데 이것을 ‘우금(牛禁)’이라고 하였다. 이 사실로 미루어 당시 부마(駙馬)라고 하더라도 잔치에 함부로 소를 잡지 못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 파주(坡州)의 금곡리(金谷里)에 있는데, 우암(尤庵)송시열(宋時烈)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있다.[비문] 1683년(숙종 9) 9월 중추부 판사(判事)이상진(李尙眞)이 차자를 올려, 고(故) 참의(參議)이척연(李惕然)을 포가(褒嘉)할 것을 청하였는데, 이척연이 효행(孝行)으로 널리 칭송받았기 때문이었다. 대신들에게 의논하라고 명하니, 대신 민정중(閔鼎重) 등이 이척연에게 직질(職秩)을 더하여 증작(贈爵)할 것을 청하였고, 숙종은 그 의견에 따라서 죽은 이척연에게 예조 판서(禮曹判書)를 증직하였다.(『숙종실록』 9년 9월 5일)

첫째 부인 여흥민씨(驪興閔氏)는 민제안(閔齊顔)의 딸인데, 자녀는 2녀를 낳았다. 둘째 부인 연일정씨(延日鄭氏)는 정굉(鄭浤)의 딸인데, 자녀는 1남 2녀를 낳았다.[『국조방목』] 아들 이진(李晉)은 현감(縣監)을 지냈으며, 장녀는 사인(士人) 이인창(李麟昌)에게, 차녀는 참봉(參奉)박태징(朴泰徵)에게, 3녀는 감사(監司)유창(兪瑒)에게, 4녀는 사인(士人) 최수원(崔壽遠)에게 각각 시집갔다. 측실에서 1남이 있는데,[『국조방목』] 서자는 이승정(李昇晶)이이다. 손자는 이봉령(李鳳㱓)·이귀령(李龜㱓)·이기령(李綺㱓)이다.[비문]

참고문헌

  • 『인조실록(仁祖實錄)』
  • 『효종실록(孝宗實錄)』
  • 『현종실록(顯宗實錄)』
  • 『숙종실록(肅宗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인조]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송자대전(宋子大全)』
  • 『국조보감(國朝寶鑑)』
  • 『농암집(農巖集)』
  • 『동명집(東溟集)』
  • 『명재유고(明齋遺稿)』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