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혁(鄭仁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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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801년(순조 1) = ?]. 조선 후기 정조(正祖)~순조(純祖) 때의 천주교도로, <신유박해(辛酉迫害)> 순교자. 세례명은 타대오. 거주지는 서울이다.

정조~순조 시대 활동

한양의 중인 집안 출신으로 약방을 운영하며 생활하던 정인혁(鄭仁赫)은 1790년(정조 14) 무렵 최필제(崔必悌)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우고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천주교 교리를 가르쳤으며, 교회 가르침을 따르고자 제사도 폐지하였다.

1791년(정조 15) 전라도 진산에서 천주교도들이 어머니 제사를 폐하여 문제가 된 <신해박해(辛亥迫害)>에 발생하자, 자신의 형제들과 함께 체포되어 형조로 압송되었다. 당시 그의 형제들과 동료들은 엄한 형벌에 천주교를 배교하였으나, 정인혁은 끝까지 신앙을 고집하였다. 그러자 형조에서 가족들이 그를 회유할 수 있게 하기 위해 3일간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가 집에 돌아오자, 그의 맏형은 형조로 들어가 “우리 집안에서는 앞으로 누구도 천주교를 신봉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다짐하였고, 형조에서는 이를 믿고 그를 다시 체포하지 않았다.(『정조실록(正祖實錄)』 15년 11월 11일),[『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정조 15년 11월 11일],[『승정원일기』정조 15년 11월 12일],[『승정원일기』정조 15년 11월 13일],[『승정원일기』정조 15년 11월 14일] 이때 그는 더 용감하게 신앙을 고집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며 이후 더욱 열심히 신앙생활에 전념하였다.

그는 최필공(崔必恭), 김이우(金履禹) 등과 함께 신앙 공동체를 만들어 교리연구에 몰두하였다. 또한 1794년(정조 18) 말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신부가 입국하자 주문모 신부를 늘 보좌하며 미사에 참석하고 성사도 받았다. 또 평신도 단체인 명도회(明道會)의 회원으로서 김이우의 집에서 이합규(李鴿逵), 손덕장(孫德章), 김이우 형제 등과 모임을 가지며 교리를 전하는데 노력하였을 뿐만 아니라, 한문으로 된 교회 서적들을 한글로 번역하여 교우들에게 전해주기도 하였다.[『사학징의(邪學懲義)』]

결국 이 같은 활동으로 인하여 정인혁은 1801년(순조 1) <신유박해(辛酉迫害)>가 발발하자 그해 2월 9일 체포되어 포도청과 형조에서 모진 심문을 받았다. 그러면서도 끝까지 천주교 신앙을 꺾지 않는 바람에, 그해 4월 1일 사형선고를 받고 다음날인 4월 2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사망하였다.(『순조실록(純祖實錄)』 1년 4월 1일)

참고문헌

  • 『정조실록(正祖實錄)』
  • 『순조실록(純祖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사학징의(邪學懲義)』
  • 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회사』상, 한국교회사연구소, 1980.
  •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한국가톨릭대사전』10,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