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향각(書香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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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의 전적과 어진 등을 정해진 장소에 봉안하기 전 임시로 옮겨 놓는 곳.

개설

책 향기가 나는 건물이라는 뜻을 가진 규장각(奎章閣) 부속 건물이다. 정조는 즉위하던 해인 1776년 후원에 터를 잡아, ‘힘써 검약함을 보일 만한 집’을 지으라고 하였다(『정조실록』 즉위년 9월 25일) 3월에 시작한 규장각의 역사(役事)는 9월에 완공되었다. 이로써 창덕궁 북원에는 주합루(宙合樓)를 비롯한 규장각 영역이 조성되어 정조의 친위세력이 결집할 장소가 되었다.

남쪽으로 부용지와 문무관이 시험을 치르던 춘당대가 내려다보이는 경사 높은 언덕에, 2층 누각으로 지어진 규장각, 그 곁에 서향각이 주합루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서향각 현판의 글씨는 정조 때 서사관(書寫官)이며 명필이던 조윤형(曹允亨)이 썼다(『정조실록』 5년 9월 16일).

위치 및 용도

서향각은 이안각(移安閣)이라고도 불렀다. 명칭에서 추측되는 것처럼 서책을 보관·보존하기 위한 장소라는 의미이다. 습기 찬 어진·어제·어필 등은 정해진 장소에 봉안 또는 보관하기 위해 일정한 기간마다 포쇄(曝曬)하였다. 포쇄란 햇볕에 말리고 바람을 쐬어 보존하는 것을 말한다. 이때 이러한 물품들을 서향각에 옮겨 놓았다.

서향각은 창덕궁의 북원, 부용지를 지나 북쪽의 어수문으로 들어서면 규장각의 서쪽에 동쪽을 향해 서 있다. 같은 담장 구획 안에 희우정(喜雨亭), 천석정(千石亭) 등과 함께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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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천 및 현황

서향각은 정조 즉위년에 규장각 건립과 함께 조성되었다. 줄곧 서책·어진·어제·어필 등을 관리하고, 학문을 연구하는 문신 학자들이 모여 왕과 토론하거나 시를 지으며, 어진을 그리기 위해 화원을 설치하는 등의 용도로 쓰였다(『정조실록』 15년 9월 28일).

대한제국기에는 황후의 양잠실로 전용되었다(『순종실록부록』 4년 5월 1일). 1909년(융희 3)에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 윤씨(尹氏)는 서향각에 들러 비단을 짜기 위한 누에를 친히 돌보았다. 서향각에 걸려 있는 ‘친잠권민(親蠶權民)’이라는 현판은 순정효황후의 글씨이다. 이를 통해 여기가 황후의 양잠실임을 대외적으로 알렸다. 일제강점기에도 서향각에 양잠소가 설치되어 순정효황후와 종친들이 함께 친잠하였다.

형태

정면 8칸, 측면 3칸 규모의 초익공집이며 부연을 단 겹처마에 팔작지붕이다. 세벌대 기단 위에 놓여 있고, 기단 위 중앙에 두 개의 계단이 놓여 있다. 가운데 2칸은 마루, 좌우 각 2칸씩은 방이며 양쪽 끝 각 1칸씩은 누(樓)로 구성되어 있다. 정면에서 보면 마루가 아닌 벽체에도 모두 난간대를 달아 건축미를 더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국조보감(國朝寶鑑)』
  • 『궁궐지(宮闕志)』
  • 『다산집(茶山集)』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황성신문(皇城新聞)』「동궐도(東闕圖)」「동궐도형(東闕圖形)」
  • 문화재청, 『궁궐 현판의 이해』, 문화재청,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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