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충작(李忠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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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21년(중종 16)∼1577년(선조 10) = 57세]. 조선 중기 명종~선조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좌승지(左承旨)·충청도 관찰사(觀察使)이다. 자(字)는 군정(君貞)이고, 호(號)는 졸암(拙菴), 또는 낙빈(洛濱)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충청도 직산(稷山) 출생인데,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당은 부수(唐恩副守) 이휘(李徽)이고, 어머니 보성 오씨(寶城吳氏)는 현령(縣令)오황(吳滉)의 딸이다. 임영대군(臨瀛大君: 세종의 제 4왕자)의 현손(玄孫)이고, 예조 참판(禮曹參判)이만영(李晩榮)의 조부다. 초당(草堂)허엽(許曄: 허균의 아버지)과 친구 사이였다.

효행으로 승지(承旨)에 발탁된 후, 을사사화(乙巳士禍)의 주역인 소윤파(小尹派) 이기(李芑)·정순붕(鄭順朋)·임백령(林百齡) 등이 받은 위사공신(衛社功臣)의 칭호를 삭탈하도록 청하는 상소를 올려서 대신들을 놀라게 하였다. 사헌부 장령(掌令)과 사간원 사간(司諫)의 대간(臺諫)을 지냈는데, 강직하고 준엄하였으며, 충청도 관찰사(觀察使)와 전주 부윤(全州府尹)과 여주 목사(驪州牧使)로 재임하였을 때에는 청렴하고 행정을 간편하게 시행하였다.

명종~선조 시대 활동

1546년(명종 1) 사마시(司馬試)의 진사과(進士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26세였다. 그 후 오랫동안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다가, 1559년(명종 14) 정시(庭試)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39세였다.[『국조방목(國朝榜目)』] 바로 승문원(承文院) 저작(著作)에 보임되었는데, 저작으로 재직하던 1562년(명종 17) 그의 해박(該博)한 학문실력과 탁월한 효행을 인정받아 형조좌랑(刑曹佐郞)으로 특진되었다.(『명종실록』 17년 8월 10일) 그 후, 공조(工曹)·예조(禮曹)·병조(兵曹)의 좌랑을 역임하였고,[비문] 1564년(명종 19)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이 되었다가, 이듬해 사헌부 헌납으로 전임되었다. 이후 병조 정랑(正郞)을 거쳐서, 1566년(명종 21) 사헌부 장령(掌令)에 임명되었다.

1568년(선조 1) 선조 즉위 후, 다시 사헌부 장령(掌令)이 되었고, 성균관 사성(成均館司成)·사섬시 정(司贍寺正)을 거쳐서, 사간원 사간(司諫院司諫)에 임명되었다.[비문] 1570년(선조 3) 효행으로 특별히 승정원(承政院) 우부승지(右副承旨)로 발탁되었으며, 이어 좌승지(左承旨)로 승진되었다.[비문] 1573년(선조 6)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이 되었다가,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에 임명되어 외방으로 나갔다. 1574년(선조 7) 전주 부윤(全州府尹)을 거쳐서,[『미암집(眉巖集)』], 1576년(선조 9) 여주 목사(驪州牧使)에 임명되었는데. 이충작은 고을에 재임하는 동안 행정을 간편하게 줄이고, 청렴하게 관직을 수행하였으므로, 그가 임기를 마치고 떠난 뒤, 마을에서는 거사비(去思碑)를 세워 선정(善政)을 칭송하였다.[비문] 1578년(선조 11) 4월 5일 집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 58세였다.[비문]

성품과 일화

타고난 자질과 성품은 마치 푸른 소나무에 앉은 학(鶴)처럼 신선한 느낌이 들고, 지조와 기개는 봉황새가 천 길 높은 곳으로 날아다니는 것처럼 거룩하게 보여서, 보통 사람들은 감히 그 뒤를 따르거나 올라갈 수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가 선(善)을 좋아하고 옛 도리를 숭상하는 마음이 마치 기호품을 좋아하는 것처럼 강렬하였는데, 일을 논할 때에는 이러한 마음에 이르지 못할까 항상 걱정하였다. 그는 시문(詩文)에 능했을 뿐 아니라, 견문(見聞)이 넓어서, 주위 사람들이 고금(古今)의 일에 대하여 물어보면, 마치 메아리가 치는 것처럼 척척 대답해 주었다. 또한 가슴이 탁 트여 있어서, 누구나 그를 대면하면 즐거운 기색이 얼굴에 가득하였고, 사람들로 하여금 물아(物我)를 잊도록 만들어 주었다.[비문]

아버지 상(喪)을 당하여 거상(居喪)할 때, 장례와 제사를 모두 몸소 치렀다. 죽만 먹고 다른 음식은 입에 대지 않았으므로, 일이 힘에 부쳐서 땀을 비 오듯이 흘렸으나 끝까지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무덤이 있는 산(山)은 서울 도성(都城)에서 10여 리(里)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거상하면서 몸이 고달프고 힘든 와중에도 걸어서 성묘(省墓)를 하러 다니다가 쓰러져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하였다. 이에 친구들이 그를 부축하여 함께 성묘를 가곤 하였다.[비문]

벼슬살이를 청렴결백하게 하였고, 준엄하고 정직하게 일을 처리하였다. 왕이 그의 행실을 가상하게 여겨, 도목정사(都目政事)에서 3망(望: 후보자)을 추천할 때, 이조(吏曹)가 비록 그의 이름을 끝자리에 두더라도 반드시 낙점(落點)하여 등용하였다. 효성이 지극했던 그는 어머니가 돌아가자, 너무 슬퍼한 나머지 마침내 왼쪽 눈을 실명(失明)하기에 이르렀다. 3년 탈상한 뒤에 승지(承旨)로 임명되었는데, 대신들이 몸이 온전치 못한 자를 임금 가까이 두는 것이 옳지 않다고 반대하자, 선조는 “오늘날 조정에 이충작의 눈을 가진 사람이 또 있는가? 내가 그의 눈을 취하였으니 그대들은 헐뜯지 말라.”하며 대간의 논의를 일축시켰다.

그가 승정원의 승지(承旨)로 재임하면서 을사사화의 주역인 소윤(小尹)파 이기(李芑)·정순붕(鄭順朋)·임백령(林百齡) 등에게 내린 위사공신(衛社功臣)의 칭호를 추탈(追奪)하도록 청하는 상소를 지어서 올렸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미세한 곡절들을 털끝만큼도 빠뜨리지 않고 모두 기록하여, 간흉(奸凶)들이 핑계대고 발뺌하는 심보와 은밀히 숨기는 죄상을 조금도 남김없이 모두 드러냈으므로, 조정의 대신들이 모두 이충작의 용기에 놀라고, 또 그의 문장이 뛰어나고 훌륭함에 감탄하였다.[비문]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 양주(楊州) 해촌(海村)의 선영(先塋)에 있는데, 초당(草堂)허엽(許曄: 허균의 아버지)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있다.[비문] 부인 이씨는 남편이 병이 들자 정성껏 병구완을 하였다. 남편이 돌아가자, 장례를 치른 후, 남편 무덤에 비를 세우려고, 둘째사위 허호(許昊)를 그의 친척인 관찰사허엽에게 보내 비문을 부탁하고, 비석을 새겨 남편 무덤 앞에 묘갈(墓碣)을 세웠다.

첫째부인 온양정씨(溫陽鄭氏)는 진사(進士) 정호(鄭瑚)의 딸인데, 자녀는 2녀를 낳았다. 둘째부인 함안이씨(咸安李氏)는 삼척 부사(三陟府使)이진(李震)의 딸인데, 자녀는 3남 2녀를 두었다.[비문] 장남 이견철(李堅鐵)은 판관(判官)을 지냈다. 차남은 이견옥(李堅玉)이고, 3남 이견봉(李堅峰)은 현감(縣監)을 지냈는데, 모두 후부인 이씨가 낳았다. 장녀는 유학(幼學) 소순복(蘇順福)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유학(幼學) 허호(許昊)에게 시집갔는데, 모두 선부인 정씨의 소생이다. 3녀는 호조 정랑허적(許樀)에게 시집갔고, 4녀는 부사(府使)성계선(成啓善)에게 시집갔는데, 모두 후부인 이씨의 소생이다. 손자 이만영(李晩榮: 1604∼1672)은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호조 참판·북병사(北兵使)·예조 참판·평안도 관찰사를 지냈다. 호는 설해(雪海)이고, 『설해집(雪海集)』이 남아 있는데, 이견철의 맏아들이다.[족보]

참고문헌

  • 『명종실록(明宗實錄)』
  • 『선조실록(宣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초당집(草堂集)』
  • 『직산읍지(稷山邑誌)』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미암집(眉巖集)』
  • 『상촌집(象村集)』
  •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 『순암집(順菴集)』
  • 『월정집(月汀集)』
  • 『임하필기(林下筆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