흠봉각(欽奉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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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국에서 보내온 고문(誥文)과 조칙(詔勅)을 보관하던 곳.

개설

명나라와 청나라에서 보낸 고문과 조칙은 조선시기 외교 문서를 담당하는 관리처인 승문원(承文院) 영역 안에 높은 각(閣) 하나를 세워 보관하도록 하였다. 조선초에는 장서각이었고 후에 화재로 소실되어 영조 때 경희궁, 창경궁 두 곳에 승문원을 두었다. 이 가운데 창경궁에 세운 각의 이름을 ‘흠봉각’이라 하였다. 정조 때 황단 서쪽에 각을 하나 세우고 건물의 외부에는 경봉각 편액을, 내부에는 흠봉각 편액을 달아 하나로 만들었다. 지금은 황단(皇壇)과 함께 사라지고 터만 남아 있다.

위치 및 용도

고려의 사대교린(事大交隣)하는 제도를 그대로 본받아 1410년(태종 10)에 승문원으로 고쳐 부르고 황제의 칙서 등을 간수하는 관아로 세웠다. 궁궐 밖에 있었으나 공경하고 높이는 의미를 담아 1433년(세종 15) 궐내로 옮겼다. 광화문(光化門) 안, 홍례문(弘禮門) 밖에 세우고 장서각을 두어 명나라 황제의 고문, 조서 칙서 등의 글을 보관하는 곳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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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천 및 현황

1770년(영조 46)에 경희궁과 창경궁에 각각 승문원을 두고 경희궁에 세운 각을 ‘경봉각’, 창경궁에 세운 각을 ‘흠봉각’이라 하였다. 편액은 영조가 친필로 써서 건물에 걸었다. 경희궁의 승문원은 흥화문(興化門) 안에 위치해 있었고 창경궁의 흠봉각은 동룡문(銅龍門) 내에 자리해 있었다.

1799년(정조 23)에는 승문원의 청사가 무너져 한 칸 집만 길가에 덩그러니 남아 있어 오가는 자들의 이목에 거슬리니 철거하여 담장 밖으로 옮기라는 명을 내린다. 이 담장 밖은 황단의 서쪽 담장 곁이었다. 건물을 이전하는 데 대한 정조의 논리는 명백했다. 황단 곁에 황조의 고문과 조칙을 옮겨 놓는다면 명나라의 찬란한 문화를 접하는 듯하니 주변을 맴돌 때 마음이 즐겁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또한 황단의 동쪽에는 이미 봉실이 있으니 서쪽 담장 밖 계단에 두고, 한 칸 집의 틀을 그대로 옮겨 공사의 규모를 크게 하지 말자는 명을 내렸다. 1799년 7월 25일에는 완공되어 건물의 안팎 문 위에 영조가 친필로 쓴 경봉각, 흠봉각 두 개의 편액을 걸었다.

이후 고종시기까지 경봉각을 봉심(奉審)하였으나 1907년(융희 1)부터 황단을 비롯한 영역 내 부속 건물의 모든 관리는 통감부(統監府)하에 있었다. 이후의 어느 사이에 흠봉각은 사라졌고 이름만 남게 되었다.

참고문헌

  • 『일성록(日省錄)』
  • 『궁궐지(宮闕志)』
  • 『동계집(東溪集)』
  • 『만기요람(萬機要覽)』
  • 『순암집(順菴集)』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임하필기(林下筆記)』
  • 『홍재전서(弘齋全書)』「동궐도(東闕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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