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李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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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04년(연산군 10) = ?]. 조선 전기 성종(成宗)~연산군(燕山君) 때의 문신. 예조 정랑(正郞) 등을 지냈다. 자는 낭옹(浪翁)이고, 호는 재사당(再思堂)이다.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창평현령(昌平縣令)이공린(李公麟)이고, 어머니 순천 박씨(順天朴氏)는 집현전(集賢殿) 학사(學士)박팽년(朴彭年)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이윤인(李尹仁)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참판(參判)이계번(李繼蕃)이다. 이조 좌랑(佐郞)이오(李鰲)와 판결사(判決使)이구(李龜)의 동생이자, 예조 판서(判書)최명창(崔命昌)의 자형(姊兄)이기도 하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무오사화(戊午士禍)> 유배를 당하고,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참형을 당하였다. 절의를 지킨 행의(行義)로 사림(士林)으로 크게 추앙받았다.

성종~연산군 시대 활동

1480년(성종 11) 사마시(司馬試) 진사과(進士科)에 합격하고, 성균관(成均館)에 입학하여 공부하다가 9년이 지난 1489년(성종 20) 식년(式年)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방목(榜目)』] 처음에 승문원(承文院) 정자(正字)에 보임되었다가 성균관 박사(博士)에 임명되어, 봉상시(奉常寺)의 직무를 겸임하였다.(『성종실록』 23년 11월 11일) 당시 이원은 그의 스승 김종직에게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내려줄 것을 논의하였는데, 봉상시가 시호를 심의하는 일을 맡아보았기 때문이다.(『성종실록』 24년 1월 9일) 이 때문에 이원은 김종직의 사림파라고 지목되어 연산군 때 사화(士禍)에서 화(禍)를 당하였다.(『연산군일기』 4년 7월 18일) 이어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이 되었으나 견책을 받아 파직되자, 유명한 산수(山水)를 유람하면서 은둔하였다. 금강산을 유람할 때 마하연(摩訶衍)의 중이 이원을 보고 묻기를, “눈으로 만물을 보았는가. 만물이 안중으로 들어왔는가.” 하니, 이원이 대답하기를, “눈으로 만물을 보았고, 만물도 안중으로 들어왔다.”라며 답하고, 『격물물격설(格物物格說)』을 저술하였다.

1495년(연산군 1) 홍문관(弘文館)에 들어가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그 뒤 호조 좌랑(佐郞)과 예조 좌랑 등을 역임하며 봉상시(奉常寺)의 관직을 겸하였다. 1498년(연산군 4) 김종직의 사초(史草)인 『조의제문(弔義帝文)』 때문에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김종직의 문인이던 이원은 사림파로 지목되어 평안도 곽산으로 유배되었다가, 3년 만에 감형되어 전라도 나주로 옮겼다.(『연산군일기』 4년 7월 1일),(『연산군일기』 4년 7월 26일),(『연산군일기』 4년 7월 2일),(『연산군일기』 6년 5월 7일) 그리고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가 일어났다.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廢妃尹氏)를 폐출하는 데에 관계된 모든 관료들이 숙청당할 때 나주에 유배되었던 이원도 아울러 죄를 받아 유배지 나주에서 참형되었고, 그의 집안도 적몰(籍沒)당하였다.(『연산군일기』 10년 10월 24일) 부자와 형제도 모두 연좌되었는데, 아버지 이공린은 전라도 해남(海南)으로 유배되었고, 그의 8형제는 뿔뿔이 흩어졌다. 다섯째 동생 이별(李鼈)은 황해도 평산(平山)의 옥계산(玉溪山)으로 들어가 은둔하면서, 「장육당육가(藏六堂六歌)」를 지었고, 막냇동생 이곤(李鯤)은 충청도 청주의 서계(西溪)로 들어가서 은거하였다. 여러 형제들은 갑자사화로 인하여 은둔하며 세상에 나가지 않았다.

1506년(중종 1) <중종반정(中宗反正)>이 일어나자 사림파를 대대적으로 석방하여 모두 벼슬을 회복시켰다. 이때 이원은 승정원(承政院) 도승지(都承旨)로 추증되었고, 그의 자손들도 등용되었다.

저서로는 『금강록(金剛錄)』이 있고, 문집으로는 『재사당집(再思堂集)』 등이 있다.

성품과 일화

이원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박팽년과 같은 명신(名臣)의 후손으로서 높은 기상을 좋아하여, 자신의 행실을 깨끗하고 고상하게 가지려고 노력하였다. 젊어서 김종직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또한 학문을 좋아하여 성인의 글이 아니면 읽지 않았으므로, 장차 훌륭한 충절을 지키는 유학자가 되리라고 기대하였다. 그러므로 남효온(南孝溫)이 이원(李黿)을 칭찬하기를, “나이 어린 임금[단종]을 맡길 수 있는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이원은 김종직의 문인이었으므로 사림파로 지목을 받아 평안도 곽산으로 유배되었다가 3년 만에 감형되어 전라도 나주로 옮겼다.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연산군이 어머니 윤씨를 폐출할 때 관련된 모든 관료들을 체포하여 잔혹한 형벌을 집행하였다. 당시 이원은 김종직의 제자라고 하여 사형으로 논죄하여 유배지에서 형벌을 집행하려고 하였다. 이때 나주의 옥(獄)을 관리하던 노복(奴僕)이 죄 없이 죽는 이원을 안타깝게 여겨 다가와서 귓속말을 건네기를, “임금이 임금답지 않는데, 죄가 아닌 죄를 억울하게 뒤집어쓰고 어찌 죽으려고 하십니까. 이장곤(李長坤) 대감처럼 왜 달아나지 않습니까.” 하면서, 거제도에서 심문을 받다가 달아난 이장곤의 예를 들어 말하였다. 이때 이원이 슬픈 표정을 띠고 한참 동안 있다가 말하기를, “임금이 임금답지 않더라도, 신하는 임금의 명령을 따르지 않을 수 없다.” 하고 노복의 제의를 거절하였다. 이원은 나주에서 참형을 당할 때에도 일체 모든 것을 체념하고 태연자약하게 죽음에 임하였다.

연산군이 그 말을 듣고 더욱 노하여, “그놈은 죽으면서도 잘난 체하였다.” 하고, 이원의 집안을 적몰하게 하였다. 이에 아버지와 형제들이 모두 연좌되어 유배되거나 금고(禁錮)를 당하였는데, 아버지 이공린은 전라도 해남(海南)에 유배되었다. 셋째 동생 이타(李鼉)와 넷째 동생 이별은 이로 인해 은둔하고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중종반정으로 사림파를 대대적으로 석방하고 모두 벼슬을 회복시켜 주면서, 이원은 승정원 도승지로 추증되었고 그의 자손들도 등용될 수 있었다.

일찍이 이원의 아버지 이공린이 젊었을 때 집현전 학사박팽년의 딸에게 장가를 갔는데, 혼례를 치른 날 밤에 신랑 이공린이 꿈을 꾸니, 여덟 사람의 형제가 그를 찾아와서 목숨을 구걸하였다. 꿈에서 깨어난 이공린은 이상한 냄새를 맡고 아내 박씨에게 물어보니, 장모가 사위에게 주려고 자라 여덟 마리를 가마솥에 넣고 막 삶으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신랑 이공린은 장모에게 간청하여, 아내 박씨와 함께 자라 여덟 마리를 연못에 놓아주었으나, 자라 한 마리는 이미 목을 다쳐서 살지 못하고 죽었다. 그 뒤에 이공린과 부인 박씨 사이에 아들 여덟 명이 차례로 태어났는데, 이름을 자라[黽]와 고기[魚]의 부수(部數)를 넣어, 이오(李鼇)·이구(李龜)·이원·이타·이별·이벽(李鼊)·이경(李鯁)·이곤이라고 지었다. 경주 이씨(慶州李氏) 집안의 8형제가 모두 학문에 뛰어나서, 생원시(生員試)와 진사시(進士試)에 장원하고 문과에 급제하는 자가 많았으므로, 선비들은 중국 한(漢)나라 ‘순씨 팔룡(荀氏八龍)’이라고 일컬었다. 한나라 학자 순숙(荀淑)이 아들 8형제를 두었는데, 모두 학문에 뛰어나서 출세하였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순씨 팔룡’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성호전집(星湖全集)』 권8]

이원이 봉상시에 있을 때 김종직의 시호를 ‘문충’이라고 의논하였는데, 연산군이 이를 기억하고 갑자사화 때 김종직의 제자 중에서 가장 나쁘다며 참형을 시켰다. 이공린과 나머지 형제들도 사화에 연루되어 귀양을 가거나 금고를 당하였으나, 중종 때 모두 사면되었다. 그러므로 8형제 중에서 연산군 때 두 차례의 사화를 거치면서 목숨을 잃은 사람은 이원 한 사람뿐이었다. 후세 사람들은 이공린의 자라 꿈이 과연 맞았다고 감탄하였다. 「꿈에서 본 자라[夢鼈]」는 김시양(金時讓)의 『부계기문(涪溪記聞)』에 실려 있는데, 김시양은 이별의 현손과 혼인하였기 때문에 그 집안의 자손에게 직접 들었다고 한다. 허목(許穆)이 『미수기언(眉叟記言)』에서 이원의 묘지명과 추모(追慕)의 글을 쓰면서 이 설화를 재인용하였다.[『기언(記言)』 별집 권19, 권21]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양주(楊州)의 동쪽 천계촌(泉溪村) 개성 최씨(開城崔氏) 선영(先塋)에 있는데, 허목이 지은 묘지명이 남아있다. 무덤은 현재 양주 덕계동에 있는데, 장인 최철손(崔鐵孫)과 처남 최명창(崔命昌)의 무덤 곁에 있다. 갑자사화를 당했을 때 부인 최씨의 동생인 승문원 정자최명창이 곧바로 벼슬을 버리고 나주로 내려가서, 자형인 이원의 시신을 몰래 수습하여 최씨의 선영에 반장(返葬)하였다. 나중에 부인 최씨가 세상을 떠나자, 동생 최명창은 누나인 최씨 부인을 이원이 묻힌 곳에 합장(合葬)하였다. 전라남도 나주의 영강사(榮江祠), 평안북도 정주군 곽산의 월포사(月浦祠)에 제향되었다.

부인 개성 최씨는 부사과(副司果)최철손의 딸인데, 자녀는 4남을 두었다. 장남 이수(李洙)는 군수(郡守)를 지냈고, 차남 이강(李江)은 통례원(通禮院) 우통례(右通禮)를 지냈고, 3남은 이하(李河)이고, 4남은 이발(李渤)이다.[『기언』 별집 권21] 장남 이수의 손자 이홍업(李弘業)은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을 지냈는데, 직언하다가 선조(宣祖)의 미움을 받아 함경도 경성판관(鏡城判官)으로 좌천되었다. 그런데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적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군사가 함경도 회령에 이르자, 회령의 토민(土民) 국경인(鞠景仁)이 회령에 근왕병(勤王兵)을 모집하러 온 임해군(臨海君)·순화군(順和君) 두 왕자를 체포하여 왜군에게 넘겼다. 가토 기요마사는 두 왕자에게 강제로 강화(講和) 문서를 쓰게 하고, 이홍업에게 이것을 행재소(行在所)의 선조에게 전달하게 하였다. 이홍업이 강화 문서를 의주(義州)의 선조에게 전달하자, 대간에서 나라를 욕되게 하였다며 이홍업을 탄핵하여 사형에 처하게 되었으나, 선조가 사형을 감면하고 길주(吉州)로 유배시켰다. 이홍업은 함경도 길주에서 4년 동안 귀양살이를 하다가 풀려난 후 세상을 등지고 은둔 생활을 하면서 불행하게 살다 죽었다. 이홍업의 손자 이언무(李彦茂)는 유일로서 선행이 널리 알려져서, 효종(孝宗) 때 선행을 표창하여 정문(旌門)이 세워졌고, 송라찰발(松羅察訪)에 임명되었다.

또 4남 이발(李渤)의 손자 이시발(李時發)은 과거에 급제하여 형조 판서(判書)를 지냈다. 이시발은 2남을 두었는데,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이경휘(李慶徽)는 이조 판서를 지냈고, 이경억(李慶億)은 좌의정을 지냈다. 이원이 절의의 행위로써 사림의 추앙을 받았기 때문에 선조 이후 사림파가 집권하였을 때 그 후손들은 크게 영달하였던 것이다.

한편 이원의 막냇동생 이곤의 후손도 충청도 청주의 ‘옥화(玉華) 9곡(曲)’에 자리 잡았는데, 그 손자 이득윤(李得胤)은 선조 때 『주역(周易)』을 연구하여 역학(易學)의 제1인자가 되었고, 그 증손자 이홍유(李弘有)도 유명한 학자가 되었다.

참고문헌

  • 『성종실록(成宗實錄)』
  •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 『중종실록(中宗實錄)』
  • 『숙종실록(肅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재사당집(再思堂集)』
  • 『금강록(金剛錄)』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해동명신록(海東名臣錄)』
  • 『기언(記言)』
  • 『농암집(農巖集)』
  • 『미수기언(眉叟記言)』
  • 『백호전서(白湖全書)』
  • 『부계기문(涪溪記聞)』
  • 『사계전서(沙溪全書)』
  •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성호전집(星湖全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후광세첩(厚光世牒)』
  • 『육선생유고(六先生遺稿)』
  • 『일두집(一蠹集)』
  • 『점필재집(佔畢齋集)』
  •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 『청음집(淸陰集)』
  • 『추강집(秋江集)』
  • 『패관잡기(稗官雜記)』
  • 『한강집(寒岡集)』
  • 『한수재집(寒水齋集)』
  • 『해동야언(海東野言)』
  • 『해동잡록(海東雜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