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자각(丁字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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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왕릉에 설치한 조영물의 하나로, 홍살문 안, 봉문 아래 제사를 지내기 위해 용마루를 정(丁) 자 모양으로 지은 집.

개설

정자각은 국상을 담당하는 빈전도감(殯殿都監), 국장도감(國葬都監), 산릉도감(山陵都監) 가운데 산릉도감에서 맡아 짓는다. 규모는, 각은 3칸이고 남북의 넓이는 20척 6촌이며, 동서의 길이는 35척 7촌이다. 정중앙의 1칸은 13척 2촌이고, 좌우의 2칸은 각각 11촌 2촌 5푼이다. 정전의 남쪽 정중앙에 연달아 2칸을 건립하는데, 모양이 정(丁) 자와 같다. 그리고 모두 단청을 한다.

형태

정자각은 왕릉 입구인 홍살문에서 보면 정면으로 보이는 ‘丁’ 자 형태의 건축물로, 그 모양이 ‘정(丁)’ 자와 비슷하다고 하여 붙여진 것이다. 또한 제각(祭閣)을 ‘정’ 자 모양으로 지은 것은, 중국에서 보았을 때 조선이 정남에서 약간 서쪽으로 기울은 ‘정’ 자 방향이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왕릉의 정자각과는 달리 황제의 능침에는 태양을 상징하는 ‘일(日)’ 자 모양으로 지어 침전으로 불리는데, 고종과 순종의 홍릉(洪陵)과 유릉(裕陵)의 침전이 그렇다. 이는 황제가 왕보다 신분이 한 단계 높기 때문이다.

정자각은 왕릉에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일(一)’ 자형의 정전 앞에 붙은 ‘궐(闕)’ 자 모양의 제사를 올리는 공간인 제전(祭殿)의 맞배지붕 옆면이 정면처럼 보이도록 지어졌다. 그리고 올라가는 계단도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이어진 신도와 어도로 된 참도를 따라가다가 정자각 앞에서 90도 꺾였다가 정자각을 따라 왼쪽으로 다시 90도 꺾여 들어가서야 정자각으로 오르는 계단이 나온다. 홍살문에서 보아 정자각의 정면으로 생각된 면이 실제로는 측면이 되는 특이한 설계로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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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정자각은 참배자가 동쪽으로 들어가 서쪽으로 나오는 동입서출(東入西出)이 되도록 설계됐다. 그런데 참도를 지나 정자각에 올라가는 동쪽 계단은 둘인데, 내려오는 서쪽 계단은 하나밖에 없다. 동쪽의 계단이 둘인 것은, 정자각에 들어갈 때는 신령과 사람이 따로따로 들어가도록 한 것이고, 제사를 내려올 때는 신령은 능으로 바로 가버리기 때문에 사람만이 내려오도록 계단 하나만을 둔 것이다. 때문에 동쪽의 신이 오르는 계단은 수려한 구름무늬를 새긴 난간과 삼태극 무늬의 북돌[鼓石]로 화려하게 꾸몄고, 인간이 오르는 계단은 아무런 장식 없이 소박하게 갖췄다. 화려한 계단은 능에 묻힌 왕과 왕비의 영혼이 지상을 떠나 구름을 밟고 승천하는 모습을 상징한다. 왕릉 입구의 홍살문의 삼태극과 신이 오르는 계단의 고석 삼태극은 처음과 끝을 알리는 표시이기도 하다.

현황

봉분이 시신을 모신 곳이라면 정자각은 신령과 인간이 만나는 공간이다. 즉 정자각은 제향을 하는 곳이다. 안에는 혼이 깃들 수 있도록 의자를 놓았는데, 궁궐 정전의 용상과 같도록 했다. 보통 무덤에서는 봉분 앞에 설치한 상석에다 제물을 차려 제사를 지내지만, 왕릉의 경우는 상석이 아닌 정자각에서 제사를 지낸다. 그래서 왕릉에서는 이를 상석이라 하지 않고 혼이 놀고 머무는 곳이라 하여 혼유석(魂遊石)이라 한다. 또한 일반 무덤에서는 먼저 산신에게 산신제를 지낸 뒤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지만, 왕릉은 그 반대다. 왕은 만인지상의 존재이기 때문에 왕릉에서 먼저 제사를 지낸 다음 능 밑에서 산신에게 제사를 올린다.

제사를 마치면 제관들은 서쪽 계단은 타고 내려온다. 하지만 영혼은 다시 하늘이나 능침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여겨 정자각 뒤에 계단을 두었다. 정자각 뒷문을 나서면 신계(神階)와 만나는 계단이 그것이다. 이것이 조선왕들의 위패를 모신 종묘 정전과 다른 점이다. 종묘 정전에는 위패에 혼령이 빙의하는 것으로 여겨 정자각처럼 뒷문을 두지 않았다.

참고문헌

  • 『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
  • 정종수, 「조선초기상장의례연구」, 중앙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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