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민(李齊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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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28년(중종 23)∼1608년(광해군 즉위) = 81세]. 조선 중기 명종~선조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도승지(都承知)·대사헌(大司憲)·대사간(大司諫)이고, 증직(贈職)은 의정부 좌의정(左議政)이다.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자(字)는 경은(景誾)이고, 호는 서간(西澗)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함원군(咸原君)이옹(李顒)이고, 어머니 평강채씨(平康蔡氏)는 채중경(蔡仲卿)의 딸이다. 효령대군(孝寧大君)의 현손이고, 기묘(己卯) 명현(名賢) 김식(金湜: 김육의 고조부)의 처조카이다.

명종 시대 활동

1552년(명종 7) 사마시(司馬試) 진사과(進士科)에 합격하였는데, 나이가 25세였다. 성균관에 입학하여 공부하다가, 1558년(명종 13) 식년(式年)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31세였다.[『국조방목(國朝榜目)』] 바로 승문원 정자(正字)에 보임되었고, 승정원 주서(注書)를 거쳐서, 성균관 전적(典籍)으로 전임되었다.[비문] 1562년(명종 17) 사간원 정언(正言)이 되었고, 1563년(명종 18) 홍문관 부수찬(副修撰)으로 전임되었다가, 홍문관 수찬(修撰)으로 승진하였다. 1564년(명종 19) 병조 좌랑(佐郞)이 되었다가, 사헌부 지평(持平)을 거쳐, 이조좌랑(佐郞)에 임명되었다. 1565년(명종 20) 홍문관 교리(校理)가 되었다가, 1566년(명종 21) 병조정랑(正郞)이 되었다.(『명종실록』 20년 6월 5일),(『명종실록』 21년 10월 1일)

선조 시대 활동

1567년(선조 즉위) 이조 정랑에 임명되었다. 1568년(선조 1) 홍문관 부응교(副應敎)를 거쳐서, 1569년(선조 1) 홍문관 직제학으로 승진하였다.[『미암집(眉巖集)』] 1571년(선조 4) 우부승지(右副承旨)에서 체임되어 경주 부윤(慶州府尹)이 되었는데, 이때 옥산 서원(玉山書院)을 창건하였다.[비문] 1574년(선조 7) 양주 목사(楊州牧使)가 되었을 때에는 도봉 서원(道峯書院)의 역사를 마무리 지었다.(『선조실록』 7년 7월 8일) 당시 이제민은 백성들을 괴롭히지 않기 위해서 자기의 녹봉을 출연해서 서원의 건축비용을 충당하였으므로, 두 서원에서 공부하는 선비들이 모두 그의 덕(德)을 추모하였다.[비문] 1576년(선조 9) 수원 부사(水原府使)가 되었는데, 읍호(邑號)가 강등되면서 체차되어 진주 목사(晉州牧使)가 되었다. 1577년(선조 10) 상(喪)을 당하였는데, 1581년(선조 14) 상례(常禮)를 마친 후, 강원도 관찰사로 파견되었다.[비문] 1582년(선조 15) 도승지(都承旨)로 발탁되었다가,[비문] 1584년(선조 17) 경기 관찰사(京畿觀察使)가 되었다.(『선조실록』 17년 1월 22일) 이후, 병조참판(參判)을 거쳐서, 1591년(선조 24) 사간원 대사간(大司諫)에 임명되었다. 이어 홍문관 부제학(副堤學)으로 전임되었다가, 1593년(선조 26) 다시 대사간이 되었다.(『선조실록』 26년 5월 7일)

1591년(선조 24) 성천 부사(成川府使)가 되었는데,[비문]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임소(任所)를 떠나지 않고, 맡은 바 책임을 다하여 성을 굳게 지켜냈으므로, 특별히 가의대부(嘉義大夫)로 승품되었다.[비문] 1593년(선조 26) 사헌부 대사헌(大司憲)이 되었고, 1594년(선조 27)다시 사간원 대사간에 임명되었다가, 중추부 지사(知事)가 되었다. 1598년(선조 31)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고, 1601년(선조 34) 돈녕부(敦寧府) 동지사(同知事)가 되었다.[비문] 1607년(선조 40) 나이가 80세가 되면서, 관례에 따라 숭정대부(崇政大夫)로 승품되었다. 1608년(광해군 즉위) 7월, 병으로 세상을 떠나니 향년 81세였다. 죽은 후, 원종공신(原從功臣)의 공훈으로 의정부 좌의정(左議正)에 추증되었다.[비문]

성품과 일화

성품이 낙천적이고 안정되었으며, 덕(德)이 많고 도량이 넓었다. 지극한 정성에서 효성과 우애의 마음이 우러나왔으므로, 친족에게 화목하게 대하였을 뿐 아니라, 친구들에게는 믿음성이 있게 행동하였다. 평소 청렴하고 검소하였고, 남에게 관대하였으나 마음은 굳세었다. 여러 차례 주부(州府)의 수령관을 지냈는데, 정사를 보살필 때에는 반드시 힘써야 할 업무를 먼저 처리하고, 오래된 폐단을 혁파하여 백성들의 삶을 향상시켰으며, 학교를 중흥시켜 선비들을 길러냈다. 경주 부윤(慶州府尹)으로 있을 때에는 옥산 서원(玉山書院)을 창건하였고, 양주 목사(楊州牧使)로 있을 때에는 도봉 서원(道峯書院)의 역사를 마무리 지었는데, 모두 백성들을 괴롭히지 않기 위해서 자기의 녹봉을 출연해서 비용을 충당하였으므로, 두 서원에서 공부하는 선비들이 모두 감탄하며, 그의 덕(德)을 추모하였다.[비문]

이제민의 비문을 쓴 잠곡(潛谷)김육(金堉)의 가문은 고조부인 김식(金湜)이 중종 때 <기묘사화(己卯士禍)>의 참화(慘禍)를 당하면서, 집안이 몰락하였다. 가문이 쇠락하면서 김식의 형제들이 집안에 은거하고 있게 되자, 찾아오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어린 김육의 기억에 이러한 상황에서 김식의 집에 높은 가마를 타고 찾아오는 사람은 단지 대사헌이제민(李齊閔)과 판윤(判尹)목첨(睦詹) 두 사람뿐이었다. 판윤목첨은 김식의 어머니의 조카였고, 대사헌이제민은 김식의 부인의 조카였다. 당시 어린 김육은 두 사람이 모두 고귀한 신분이라는 것만 알았을 뿐, 높은 관직에 있으면서 다른 사람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고모들을 찾아와서 위로하는 것이 보통 사람은 감히 할 수 없다는 사실은 알지 못하였다. 그 후, 김육이 영의정이 되었을 때, 이제민의 손자들이 김육을 찾아와 조부 이제민의 비문을 부탁하였다. 붓을 잡고 글을 쓰던 김육은 50여 년 전의 옛일을 회상하면서 이제민과 목첨 두 사람의 모습이 눈앞에 선하게 떠올랐으므로,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비통한 심정을 금할 수 없었다고 한다.[비문]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 용인(龍仁)의 광교산(光敎山) 아래에 있는데, 잠곡(潛谷)김육(金堉)이 지은 묘표(墓表)가 남아있다.

첫째부인 무안박씨(務安朴氏)는 박옹(朴壅)의 딸이고, 둘째부인 풍양조씨(豊壤趙氏)는 조덕기(趙德期)의 딸인데, 자녀는 1녀를 낳았다. 측실(側室)에서 2남을 낳았는데, 서출 장남 이순(李楯)은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현감(縣監)을 지냈으며, 서출 차남은 이난(李欄)이다. 딸은 별제(別提)이정화(李廷華)에게 시집갔다.[비문] 손자는 모두 7명인데, 장남 이순(李楯)의 아들은 이시무(李時茂)·이시번(李時蕃)·이시분(李時芬)·이시화(李時華)이고, 차남 이난(李欄)의 아들은 이시훈(李時薰)·이시행(李時荇)·이시필(李時苾)이다.

참고문헌

  • 『명종실록(明宗實錄)』
  • 『선조실록(宣祖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잠곡집(潛谷集)』
  • 『미암집(眉巖集)』
  • 『선원록(璿源錄)』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월정집(月汀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