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빈노씨(昭嬪盧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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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79년(성종 10) = ?]. 조선 3대 왕인 태종(太宗)의 후궁. 본관은 장연(長淵)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밀직제학(密直提學)를 지낸 노귀산(盧龜山)이며, 어머니 충주 최씨(忠州崔氏)는 우의정을 지낸 최렴(崔濂)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 대호군(大護軍)에 제수된 노영수(盧英壽)이다. 고모는 고려의 32대 왕 우왕(禑王)의 제3비인 의비노씨(毅妃盧氏)이다. 태종과의 사이에 1녀를 두었다.

태종의 후궁

노소빈(盧昭嬪)은 아버지 노귀산과 최렴의 딸인 어머니 충주 최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1411년(태종 11) 태종과 정비(正妃) 원경왕후(元敬王后) 사이의 불화는 점점 심해졌다. 당시 원경왕후는 태종과 함께 국가를 세웠음에도 태종이 그것을 생각하지 않고 다시 혼인을 하려고 한다는 점에 많은 불만을 갖고 있었다. 또 태종이 즉위 후 들인 잉첩(媵妾)들만 가까이 하는 것도 원경왕후의 불만 상황이었는데, 동생인 민무구(閔無咎)가 세자를 통해 권력을 부리려 했다며 문제가 된 <민무구의 옥> 등으로 인해 태종과 원경왕후의 사이는 더욱 나빠졌다. 결국 태종은 일빈이잉(一嬪二媵)의 빈어제도를 마련한 후,(『태종실록(太宗實錄)』 11년 9월 19일) 통례문(通禮門) 판사(判事)김구덕(金九德)의 딸을 빈(嬪)으로 삼고, 전 제학(提學)노귀산(盧龜山)의 딸과 전 지성주사(知成州事)김점(金漸)의 딸을 두 잉(媵)으로 삼았다.(『태종실록』 11년 10월 27일) 그리고 그 해 11월 노귀산의 딸인 노씨는 소혜궁주(昭惠宮主)에 봉해졌고,(『태종실록』 11년 11월 20일) 이후 소혜옹주(昭惠翁主)가 되었다.(『단종실록(端宗實錄)』 1년 4월 20일)

1479년(성종 10) 노소빈이 세상을 떠나자 성종은 명빈(明嬪)의 예(例)에 의하여 쌀과 콩 70석, 면포(綿布)·정포(正布) 각각 50필, 청밀(淸蜜) 10두(斗), 황랍(黃蠟) 30근, 초9燭) 10정(丁), 공석(空碩) 1백, 초둔(草芚) 10을 주라고 하였다.(『성종실록(成宗實錄)』 10년 10월 23일) 1872년(고종 9) 소혜옹주에서 소빈(昭嬪)으로 추증되었다.[『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고종 9년 12월 1일]

후손

노소빈은 태종과의 사이에서 1녀를 낳았는데, 바로 태종의 서6녀인 숙혜옹주(淑惠翁主)이다.(『태종실록』 18년 11월 8일) 숙혜옹주는 성산부원군(星山府院君)이직(李稷)의 손자이자 한성부윤(漢城府尹)이사후(李師厚)의 아들인 성원위(星原尉)이정녕(李正寧)과 결혼하였다. 부마 이정녕과의 사이에서 3남 1녀를 두었는데, 1자인 공숙공(恭肅公)이집(李諿)은 가선대부(嘉善大夫) 중추원(中樞院) 부사(副使)이대(李臺)의 딸과 결혼하여 3남 1녀를 낳았다. 2자는 이의(李誼)이고, 3자는 이전(李詮)이다. 그리고 1녀는 이창(李菖)의 처이다.

한편 숙혜옹주는 효성이 지극하였다. 어머니인 노소빈이 병을 얻어 질병가(疾病家)로 거처를 옮기자, 숙혜옹주는 노소빈을 간호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하였다.(『단종실록』 1년 4월 20일) 이에 그치지 않고 2달 후에는 어머니인 노소빈이 머무르는 질병가가 비습(卑濕)하고 낮고 좁으며, 또 여름철 무더위를 당하면 하루라도 거처할 수가 없다며 노소빈의 거처를 자신의 집으로 옮겨 보살필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하였다.(『단종실록』 1년 6월 5일)

참고문헌

  • 『태종실록(太宗實錄)』
  • 『단종실록(端宗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記略)』
  • 지두환, 『태종대왕과 친인척』, 역사문화,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