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실(朴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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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31년(세종 13) = ?]. 조선 전기 태조~세종 때 활동한 무신. 본관은 함안(咸安)이다. 아버지는 좌군도총제(左軍都摠制)박자안(朴子安)이다.

태조~태종 시대 활동

그가 이방원(李芳遠)의 휘하로 있을 때인 1397년(태조 6) 5월에 아버지 박자안이 왜적을 막지 못하여 참형(斬刑)을 당하게 되었다. 그가 아버지의 구명 운동을 극진하게 전개하여 요행히 살아나게 하였다.

1402년(태종 2) 전농시(典農寺)정(正)이 되었고, 1408년(태종 8) 상호군(上護軍)이 되었으며, 1410년(태종 10) 남포진 병마사(藍浦鎭兵馬使)가 되었다. 1411년(태종 11) 1월에 용기사 첨절제사(龍騎司僉節制使)가 되었다. 1414년(태종 14) 예조 참의(參議)이 되었는데, 그 해 9월에 임금의 특명으로 전라도 진포(鎭浦)에서 고만량(高巒梁)에 이르기까지 수로(水路)의 험난하고 평이한 것과, 황곡포(黃谷浦) 등지에 전운소(轉運所)를 두는 것의 편리한 여부와, 그리고 전라도 용안(龍安)에서 충청도 내포(內浦)에 이르기까지 육지로 전운(轉運)하는 것의 어렵고 쉬운 것을 자세히 살피고 돌아왔다. 1417년(태종 17) 2월에 경상도 수군 도절제사(慶尙道水軍都節制使)가 되었고, 1418년(태종 18) 6월에 좌군동지총제(左軍同知摠制)가 되었다.

세종 시대 활동

1418년(세종 즉위) 8월에 좌금위(左禁衛) 삼번절제사(三番節制使)가 되었고, 그 해 11월에 중군 총제(中軍摠制)가 되었다. 1419년(세종 1) 5월 상순에 다시 좌군 동지총제(左軍同知摠制)가 되었고, 그 해 5월 중순 <대마도(對馬島) 정벌>에 좌군절제사(左軍節制使)로 참가하였다. 정벌에서 돌아와 그 해 12월 홍주 판목사(洪州判牧事)가 되었고, 1420년(세종 2) 4월에 우군 총제(右軍摠制)가 되었다. 1423년(세종 5) 5월에 좌군 도총제(左軍都摠制)가 되었고, 그 해 10월에 하정사(賀正使)로 명(明)나라 서울 북경(北京)에 갔다가 그 다음 해인 1424년(세종 6) 3월에 돌아왔다. 1426년(세종 8) 3월에 우군 도총제(右軍都摠制)가 되었고, 그 해 그 뒤 전라도 수군 처치사(全羅道水軍處置使)가 되어 왜적의 배 1척을 체포하고, 적의 머리 8급(級)을 베어 안장 갖춘 말과 옷 1습(襲)을 하사받고 선온(宣醞)을 받았다. 1428년(세종 10) 9월에 중군 도총제(中軍都摠制)가 되었고, 그 해 12월에 진하 겸 사은사(進賀兼謝恩使)로 다시 명나라 서울 북경에 갔다가 1429년(세종 11) 4월에 돌아왔다. 그는 그 해 7월에 우군도총제가 되었다. 그는 도총제(都摠制)로서 병이 갑자기 위독하여 1431년(세종 13) 12월 1일 세상을 떠나자 조회를 2일 동안 폐하고, 치제(致祭)하였다.

성품과 일화

그는 지극한 효자로서 품성이 정강(精剛)하고 행실을 닦음이 염근(廉謹)하였으며 몸에는 장수와 재상의 재질(才質)이 풍부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태조실록(太祖實錄)』태조 6년 5월 16일 기사에는 그는 본래 학술이 없고 또 무예가 있는 사람도 아닌데, 태종이 그 아비 구제한 것을 어질게 여겨 금려(禁旅)를 맡게 하여 벼슬이 2품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시호

시호는 정효(靖孝)이다.

참고문헌

  • 『태조실록(太祖實錄)』
  • 『정종실록(定宗實錄)』
  • 『태종실록(太宗實錄)』
  • 『세종실록(世宗實錄)』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한국인(韓國人)의 족보(族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