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옥(金廣玉)

sillokwiki
Silman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8년 1월 9일 (화) 22:44 판 (XML 가져오기)

(차이) ← 이전 판 | 최신판 (차이) | 다음 판 → (차이)
이동: 둘러보기, 검색




총론

[1741년(영조 17)~1801년(순조 1) = 61살]. 조선 후기 정조(正祖)~순조(純祖) 때의 천주교도로, <신유박해(辛酉迫害)> 순교자. 세례명은 안드레아.

정조 시대 활동

충청남도 예산 여사울(현 충남 예산군 신암면 신암리)에서 태어난 김광옥(金廣玉)은 오랫동안 그 지역 면장(面長)을 역임하였다. 50세가 되었을 무렵 같은 지역에서 천주교 신앙을 전파하고 있던 이존창(李存昌)으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워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1801년(순조 1) 어린 순조(純祖)를 대신하여 수렴청정을 하던 정순왕후(貞純王后)가 천주교를 사학(邪學)으로 규정하고, 천주교에 대한 금압령을 내리면서 천주교도들을 탄압하는 신유박해(辛酉迫害)가 시작되었다.(『순조실록(純祖實錄)』 1년 1월 10일) 이때 대대적으로 신자들을 체포하기 시작하자 김광옥은 자신이 입교시킨 친척 김정득(金丁得)과 함께 성물과 서적을 챙겨 공주무성산(茂城山)에 숨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체포된 후 예산 관아로 압송되어 문초를 당하였으나 끝까지 천주교 신앙을 고수하였다.

이후 김정득과 함께 청주로 이송된 김광옥은 서로를 권면하며 계속되는 형벌을 견뎌 냈으며, 그 뒤 다시 한양으로 압송되었다.(『순조실록』1년 4월 23일) 그리고 같은 해 7월 13일 사형선고를 받았다.(『순조실록』1년 7월 13일) 당시 그는 “사학에 깊이 빠져 직업을 버리고 고향을 떠나 자취를 감췄다. 제멋대로 외워 익히면서, 사학과 관계되는 더러운 물건들을 숨겨 두었다. 법을 두려워하지 않고, 십계를 버리기 어렵다고 하면서 한 번 죽어도 달게 받겠다고 했다.”라는 선고를 받았다.[『사학징의(邪學懲義)』] 이후 김광옥은 고향인 예산으로 돌려보내져 1801년(순조 1) 7월 17일 60세의 나이로 참수형을 받아 세상을 떠났다.

성품과 일화

김광옥의 성품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본래 훌륭한 자질을 가지고 있었지만 지나치게 사나운 성질로 인하여 모두가 무서워하였다. 그러나 천주교 신앙을 가진 이후부터는 교리를 충실히 따르고 극기 행위를 실천하며 온순한 성격으로 바뀌었다. 1801년 체포되어 심문을 받을 때도 “모든 언약이나 위협이 소용없습니다. 다시는 제게 물어보지 마십시오.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지아비를 따르지 않습니다. 사또께서는 임금님의 명령을 어길 수 있겠습니까? 저도 천주님의 명령을 거역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저는 제 대군대부(大君大父)를 배반할 수 없습니다. 만 번 부당합니다. 우리 천주님께서 저의 비밀한 생각과 감정과 의향을 보고 계시므로 마음속으로라도 죄를 지을 수는 없습니다.”라며, 자신의 신앙을 고수하였다고 한다.[『하느님의 종 125위 약전』]

참고문헌

  • 『순조실록(純祖實錄)』
  • 『사학징의(邪學懲義)』
  • 『벽위편(闢衛編)』
  •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한국가톨릭대사전』2, 2006.
  • 한국천주교 주교회의,『하느님의 종 125위 약전』,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