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조전(大造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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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의 중궁전.

개설

내전은 왕과 왕비의 침전, 대비와 후궁들의 전각, 왕실의 생활을 시위·보좌하는 대소인원이 모여 사는 곳이다. 창덕궁 내전의 대표적 전각은 대조전이며 왕비의 영역으로 알려져 있다. 왕비의 영역은 왕과 왕비의 사적 생활을 위한 장소이기도 하지만 왕실, 내명부를 다스리는 집무 공간이기도 하였다. 경복궁의 교태전(交泰殿), 창덕궁의 대조전, 창경궁의 통명전(通明殿), 경덕궁의 융복전(隆福殿)이 보통 왕비의 전각으로 통용되거나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동일한 상황의 중궁전이 아니고 왕대마다 항상 이 전각들이 중전의 시어소로 사용되었다고 보기도 어려워 왕비의 처소를 대표하는 특징을 규정하기는 어렵다.

보통 대내(大內), 내전(內殿)이 왕실의 사적 생활이 병행되는 곳인데, 대내는 주로 외전인 정전의 안쪽에 들어 있는 전각들을 말한다. 왕이 어떤 의식을 행하고 내전으로 돌아간다고 할 때의 내전은 침전으로 운용되는 전각이 놓여 있는 곳이라고 볼 수 있다.

위치 및 용도

대조전은 희정당(熙政堂)의 북쪽에 있는 대내 곤전의 정당으로 무량각 집이다. 현재의 대조전은 1917년 대조전의 화재로 경복궁의 교태전을 옮겨 와 지은 것이다(『순종실록부록』 10년 11월 10일). 순조시기에 만들어진 「동궐도(東闕圖)」상에 보이는 대조전의 영역 안에는 집상전(集祥殿)·경훈각(景薰閣)이 북편 좌·우에 들어 있었고 부속 건물로 흥복헌(興福軒)·융경헌(隆慶軒)·양심각(養心閣)·관리각(觀理閣) 등이 대조전을 감싸고 있었다.

왕과 왕실 가족이 어떤 사적 행위를 한 장소, 특히 여성 공간인 내전을 어떻게 운용하였는지는 명확히 알 수 없다. 출생이나 사망 등 의례 관련 기록으로 추정해 보자면, 대체로 대비의 경우 집상전·경복전·수정전(壽靜殿)·통명전을 사용하였고 왕비는 대조전·경춘전(景春殿)을 사용하였으며, 세자빈은 경춘전·저승전(儲承殿) 등을 처소로 삼았다.

조선전기에는 중전이 머무는 대조전에서 왕이 신하들을 불러 야대(夜對)하거나, 연회를 즐기는 일도 있었지만 후대로 갈수록 이러한 현상은 점점 사라졌다. 임진왜란 이후 사회의 재결속을 위한 유교화의 추세 속에서 남녀유별이 강조되었기 때문에 왕을 제외한 내전 사용 인원은 모두 여성이었고, 내전의 일을 아는 것조차 금기시 되었다.

변천 및 현황

왕과 왕비의 침전은 궁궐의 중심에 있어 ‘중전’이라 한다. 중전은 왕비를 부르는 호칭이기도 한데 이곳이 왕비의 주된 공간이기 때문이다. 왕의 침전과 왕비의 침전이 따로 조성되기도 하였지만, 창덕궁은 대조전을 왕과 왕비의 침전으로 삼았다. 처음 만들어진 당시의 창덕궁에는 ‘양의전(兩儀殿)’이라는 침전이 있어 정침청(正寢廳), 동서침전(東西寢殿)으로 칭했다가, 세조대에 비로소 양의전이라는 전호를 만들었다(『세조실록』 7년 12월 19일). 이후 언제인지 확실하지 않은 때에 이 전각을 대조전으로 바꿔 부르기 시작하였다. 양의전은 왕비의 정전이 아닌 침전을 뜻하는 전각명으로 보인다. 이를 통해 창덕궁은 처음부터 내전의 정전을 왕과 왕비가 함께 거처하는 전각으로 조성한 것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으로 궁궐의 대부분이 소실되고 대조전은 1609년(광해군 1)부터 복구하였으나, 인조반정시 반군의 방화로 대조전과 많은 전각이 파괴되었다. 반정 이후 인조는 대조전과 전각들의 수리를 위해 광해군이 세웠던 인경궁의 전각들을 헐어다가 복구하였다. 당시 인경궁에서 이건해 온 건물은 인경궁 침전 중 하나인 경수전(慶壽殿)이었다. 경수전은 광해군 때 대조전과 같은 제도로 지으라고 했던 건물이었다. 이때 개건된 대조전은 큰 변화 없이 17~19세기 중궁전의 정당으로 유지되었다. 그런데 1833년(순조 33)의 대화재로 다시 한 번 내전을 잃었지만 곧 복구되었다. 이때 복구된 대조전은 주변 상황을 포함해 약간의 변화가 있었지만 45칸 규모, 본채의 형태를 대체로 유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1917년에도 화재로 대조전을 비롯한 내전 전체를 잃었다(『순종실록부록』 10년 11월 10일). 1920년 경복궁의 교태전을 옮겨와 복구하였는데, 이때의 대조전은 순조시기의 대조전과는 다른 모습이 되었다. 중앙의 지붕이 솟아올라 세 부분으로 나뉘어졌던 본채는 하나의 지붕으로 연결되었고, 월대와 전정(殿庭)은 훤히 열렸다. 본채는 물론 동·서 행각까지 전체를 쪽마루로 연결하고 난간을 둘러 화려하게 꾸몄다. 실내는 서양풍으로 꾸며져 문짝 위에는 커튼 박스를, 천장에는 샹들리에를 달았고 대청 내부의 문짝에는 유리문을 달았다. 대청에서 방으로 들어가는 분합 위, 벽체에는 봉황도와 군학도가 그려져 있다.

형태

대조전의 형태를 말할 때, 현재 창덕궁에 존재하는 대조전은 경복궁의 교태전을 이건한 건축물이기 때문에 대조전이라 말하기 어렵다. 그러나 궁궐 건축의 역사 속에서 이건의 사례는 많았기 때문에 지금의 대조전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고 참조만 할 뿐이다.

17~18세기 중궁전의 정당으로 유지되었던 대조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대청마루와 정면 2칸, 측면 3칸 규모의 온돌방을 마루의 양쪽에 놓아 동·서 익실, 좌우 대칭의 구조를 하고 있다. 여기에 다시 툇간을 4면에 둘러 본채의 평면을 완성시켰다. 다시 말해 정면에서 보면 9칸, 측면에서 보면 5칸, 총 45칸 규모의 집이다. 여기에 연달아 동·서 익각인 흥복헌과 융경헌이 좌우에 연결되어 있다. 이들 건물의 전퇴마루는 대조전 본체의 전퇴마루와 높이를 달리하고 나란히 연결되어 계단으로 오르내리도록 하였다. 정면에서 보면 중앙 대청마루 3칸의 지붕이 솟아 있고 온돌방이 되는 좌·우 익실부의 지붕은 한단 낮게 처리되어 있다. 지붕은 용마루가 없는 무량각지붕이고 이익공 겹처마의 팔작지붕 집이다.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동서 온돌이 대칭을 이루게 하고, 기단을 높였으며 월대를 놓아 장대하게 꾸몄다. 네모 모양의 전정(殿庭)을 두고 어도(御道)를 설치했으며 둘러싼 행각과 복도각, 합문 등이 여타 전각들과 상호 작용하는 유기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로써 대조전은 침전의 역할만이 아닌 내전의 권위를 드러내는 장소로 작용하였다. 즉, 궁궐 건물의 위계를 높이는 시각적 의장 요소와 왕과 왕비의 침전이 갖추어야 할 구성 요소를 빠짐없이 갖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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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동궐도(東闕圖)」「동궐도형(東闕圖形)」『국조보감(國朝寶鑑)』
  • 『궁궐지(宮闕志)』
  • 『만기요람(萬機要覽)』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한중록(閑中錄)』
  • 김동욱, 「17세기 조선조 궁궐 내전건물의 실내구성에 관한연구」, 『대한건축학회논문집』48, 1992.
  • 조옥연, 「조선 궁궐의 동조건축에 관한연구: 17~18세기 동궐을 중심으로」, 경기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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