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우(權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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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52년(명종7)∼1590년(선조23) = 39세]. 조선 중기 명종~선조의 문신. 자는 정보(定甫)이고, 호는 송소(松巢)이다. 본관은 안동인데, 권대기(權大器)의 아들이고, 이제(李濟)의 외손자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며 광해군(光海君)의 사부(師父)이다.

성리학 연구와 왕세자 사부

선조 초년 20세 때 초시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21세에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출세를 하기 위한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퇴계(退溪) 문하에서 성리학을 공부하였다. 이황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월천(月川)조목(趙穆)에게 사사(事師)하여 주자의 학설을 깊이 연구하였다. 1586년(선조19) 경릉(敬陵)참봉(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부친상을 당하여 그만 두었다. 그의 학명(學名)이 높아지자, 1589년(선조22) 선조가 그를 불러서 왕세자 광해군의 사부(師傅)로 임명하였다. 왕세자를 가르칠 적에 선조가 경서(經書)에 의문 나는 곳을 뽑아서 왕세자로 하여금 질문하게 하였는데, 그가 곧바로 의심 없이 대답하자, 선조가 칭찬하면서 손수 시(詩)를 써 주었다. 그러나 그 학문이 크게 쓰이지 못하고, 다음해에 마마에 걸려서 39세의 나이로 서울에서 돌아갔다. 동문수학한 친구 유성룡(柳成龍) · 정탁(鄭琢) 등이 호상(護喪)하여 고향 안동으로 반장(返葬)하였다.

1608년(광해군즉위) 광해군이 즉위하여, 사부 박광전(朴光前) · 민응기(閔應祺) · 정운룡(鄭雲龍) 등에게 실직 벼슬을 제수할 적에 그에게 좌승지를 추증하고, 예관(禮官)을 안동에 보내어 제사지내게 하였다.

저서로는 『송소집(松巢集)』이 있다.

사후 무덤과 서원 제향

묘소는 경상도 안동(安東) 학가산(鶴駕山) 용천(龍泉)에 있는데, 김응조(金應祖)가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다.(『학사집(鶴沙集)』 권7) 경주의 경광서원(鏡光書院)에 제향되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 『학사집(鶴沙集)』
  • 『백담집(栢潭集)』
  • 『성소복부고(惺所覆瓿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