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명룡(朴命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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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88년(선조21)~1627년(인조5) = 40세]. 조선 중기 광해군(光海君)~인조(仁祖) 때에 활동한 무신(武臣). 자는 견숙(見叔)이고, 본관은 죽산(竹山)이다. 부사(府使)박성룡(朴成龍)의 아우이다.

광해군~인조 시대 활동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형제가 외롭게 자랐다. 자라서는 완력이 남보다 뛰어났는데, 말타고 활쏘기를 일삼았다. 1616년(광해군8)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1617년(광해군9) 천거되어 선전관(宣轉官)이 되었다. 1619년(광해군11)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도사(都事)에 승진하였고, 외직(外職)으로 나가서 조산만호(造山萬戶)가 되었다. 소근진수군첨절제사(所斤鎭水軍僉節制使)에 임명되어 임기를 마치고 돌아와서, 1624년(인조2) 이괄(李适)의 난 때 형 박성룡(朴成龍)과 함께 부원수(副元帥) 이수일(李守一)을 도와 반란을 평정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그리하여 원종공신(原從功臣) 제 1등에 녹훈(錄勳)되고 고부군수(古阜郡守)에 임명되었다.

정묘호란 때 활약

건주(建州) 여진족의 대추장 누르하치(奴兒哈赤)가 임진왜란(壬辰倭亂)을 틈타서 여진족의 여러 부족을 통일하고 중국의 요동(遼東) 지방을 공격하였다. 그리고, 조선(朝鮮)의 압록강과 두만강도 침범하여 약탈을 일삼으니 조선의 관서(關西) 지방에서는 변방(邊方)의 경보가 잇달았다. 1625년(인조3) 박명룡(朴命龍)은 북방 지방으로 보내달라고 여러 번 상소하였고, 인조(仁祖)가 그 뜻을 장하게 여겨서 평안도병마우후(平安道兵馬虞侯)에 임명하여, 평안도병마절도사(平安道兵馬節度使)남이홍(南以興)의 휘하에 근무하게 하고, 종2품하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품시켰다.

1627년(인조5)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서 후금(後金) 오랑캐 군사들이 항장(降將) 강홍립(姜弘立)·박난영(朴蘭英)을 앞세워 전도(前導)로 삼고 먼저 의주(義州)를 함락한 다음 남하하여 안주(安州)에 들이닥쳐 화친(和親)을 청하였다. 그러자 그는 말하기를, “강토를 지키는 신하는 싸움이 있을 뿐이고 화친은 없다.” 하며 수천 명도 안되는 안주의 군민(軍民)들을 이끌고 싸웠다. 혼자 성위에 올라가 활을 들고 수백 명의 적을 사살하였고, 활을 쏠 수 없게 되자 칼을 들고 적과 맞서 많은 적을 사살하였으나 결국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전사하게 되었는데, 이는 1627년 1월 21일의 일이다.

묘소와 성품

시호는 충민(忠愍)이다. 묘소는 경기도 이천(利川) 저명산(猪鳴山)의 언덕에 있는데, 이진은(李震殷)이 지은 행장(行狀)이 남아있다. 인조 때 병조판서에 추증하였다. 1681년(숙종7) 평안도 안주에 충민사(忠愍祠)를 세우고 제향하였다.

그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천성이 관후(寬厚)하면서도 강개(忼慨)를 숭상하고 기절(氣絶)을 좋아하였다. 남의 곤궁을 보면 반드시 힘을 다하여 돌보아주고, 험난한 것을 피하지 않았다. 효우(孝友)가 돈목(敦睦)하여 향리(鄕里)에서 칭찬을 받았다. 완력이 남보다 뛰어났으나, 몸가짐을 삼가는 것이 성실하여 선비 같았다. 평소에 개연히 항상 분발하여 몸을 돌보지 않고 국가의 위급한 때에 몸을 바칠 각오를 하였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인조실록(仁祖實錄)』
  • 『숙종실록(肅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약천집(藥川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하담파적록(荷潭破寂錄)』
  •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 『광해조일기(光海朝日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