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희묘(文禧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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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효세자(文孝世子)의 제향을 위한 사묘(祀廟).

개설

문효세자는 정조와 의빈성씨(宜嬪成氏) 사이에서 태어났으나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 인물이다. 문희묘는 문효세자의 제사묘이며 고종대에 의소세손(懿昭世孫)의 영소묘(永昭廟)와 합쳐졌다. 1908년(융희 2) 황실의 제사 제도를 개정하면서 헐렸다(『순종실록』 1년 7월 23일).

위치 및 용도

조선시대 한성부 북부 안국방(安國坊)에 의빈궁이 있었는데, 문희묘는 의빈궁의 서쪽 담 바깥쪽에 위치하였다. 문효세자의 신위를 모시고 문효세자의 제사를 담당하였다(『정조실록』 13년 4월 25일).

변천 및 현황

문희묘의 원래 터는 정조의 생부인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제사궁인 경모궁 남쪽 담 바깥쪽으로 정해졌다. 그러나 1786년(정조 10) 9월 문효세자의 어머니인 의빈이 죽자, 인정상 문희묘의 터를 의빈묘 근처로 옮기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 나왔다. 이에 의빈궁 서쪽 담 바깥쪽의 집터를 사들여 거기에 살던 이들을 다른 곳으로 옮기게 하고 그곳에 문희묘를 영건했다. 1789년(정조 13) 4월 26일에 문희묘 영건이 완료되어 위패를 봉안했다.

고종 연간에는 의소세손의 영소묘에 합사했다가 1900년(광무 4) 영희전(永禧殿)의 옛터로 옮겨 봉안했다(『고종실록』 37년 5월 30일). 1908년(융희 2) 7월 23일 황실의 제사 제도를 개정하면서 영소묘에 봉안되어 있던 의손세손과 문효세자의 신위를 무덤 앞에 묻었다. 제사는 1년에 한 번 지내게 하였으며 해당 궁과 사당은 모두 국유로 이속시키면서 사우(祠宇)는 훼철되었다.

형태

안국방에 건립된 문희묘의 공간 구성과 배치는 『문희묘영건청등록(文禧廟營建聽騰錄)』의 내용과 정당(正堂) 이하 여러 건물의 도설(圖說)을 통해 알 수 있다.

『문희묘영건청등록』에 기록되어 있는 공역의 내용은 두 가지 성격으로 나뉘어 이루어졌다. 먼저 문희묘를 영건하는 내용이 있으며, 다음으로 문희묘역에서 의빈궁을 잇는 곳의 담장·대문, 어재실 등을 보수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특별히 문희묘에서 신주를 모셔 두던 감실(龕室)은 선희궁(宣禧宮)의 제도를 따랐다고 기록되어 있다.

영건 공사 당시 새로 건립되거나, 의빈성씨의 제사묘와 합치면서 보수된 규모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정당 및 툇간 9칸, 이안청 1칸, 내신삼문 3칸, 중배설청 3칸, 제기고 3칸, 내동(內東)담 13칸, 서담 13칸, 북담 15칸, 남담 4칸, 신삼문외 동담 5칸, 남담 4칸 반, 외신삼문 3칸, 내관입접처 3칸, 수복입접처 3칸이 새로 만들어졌고 정당 동변 이목기문, 서변 이목기문, 외신삼문 서변 평중문도 새로 건설되었다.

어재실의 보수 내역은 다음과 같다. 퇴루는 보수하였고, 북가퇴·북변차양·서변차양은 새로 만들었다. 협방루청판·반자·전면퇴는 보수하였고, 협방반자는 개조하였다. 전면담은 9칸 반, 재실북변취병은 23칸을 만들고, 기존의 재실정문·협문·좌우행각은 1칸씩 새로 더 만들었다. 서행각 8칸은 변형하여 보수했고, 요가(要家) 1칸은 새로 만들었다.

향대청의 6칸과 전사청의 5칸 반은 변형하여 보수했다. 기존의 향대청 후담은 7칸 반, 전사청 동담은 4칸 반을 더하여 신축했다. 북담 5칸, 전사청 중문 1칸, 향대청 중문 1칸, 외대문 3칸, 협중문 1칸은 새로 만들었다.

외북담 16칸, 서담 38칸, 남담 18칸, 동담 3칸, 대문 밖 하인청 모서리담 반 칸, 의빈궁 후북토담 10칸 반을 신축하여 총 86칸 반을 새로 지었다. 외행각 25칸, 우물 남변중문 1칸은 새로 지었고 서외행랑퇴합 13칸, 남외행랑 4칸 반은 보수하였다. 의빈궁 조과청 및 툇간 4칸 반, 남담 3칸, 중문 1칸은 새로 지었으며, 본궁 상직방, 본묘 대문 건너 변집은 보수하였다. 토담 9칸도 신축하였다.

참고문헌

  • 『문희묘영건청등록(文禧廟營建聽謄錄)』
  • 『문희묘일기(文禧廟日記)』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