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빈(朴謹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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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 = ?]. 조선 7대 왕인 세조(世祖)의 후궁. 본관은 선산(善山)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세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세조의 후궁이 되었다. 세조와의 사이에 2남을 낳았는데, 1자는 덕원군(德源君)이서(李曙)이며, 2자는 창원군(昌原君)이성(李晟)이다.

세조의 후궁

박근빈(朴謹嬪)은 세조(世祖)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세조가 맞아들인 후궁으로, 세조가 왕위에 오른 후에 귀인(貴人)에 봉해져서 자수궁(慈壽宮)에 머물렀다. 1464년(세조 10)에는 송사(訟事)에 휘말려 어떤 사람과 노비 소송을 하였는데, 형조에서는 양쪽 모두 부당하다며 속공(屬公)하라는 판결을 내렸으나, 세조가 이를 따르지 않고 박근빈에게 노비를 주었다.(『세조실록(世祖實錄)』 10년 8월 13일)

1483년(성종 14) 성종(成宗)은 세조의 후궁인 박귀인(朴貴人)을 근빈(謹嬪)으로 삼았다.(『성종실록(成宗實錄)』 14년 6월 15일) 이듬해인 1484년(성종 15)에는 박근빈의 차남인 창원군이 세상을 떠났고, 이에 성종은 시호(諡號)를 여도(戾悼)로 내려주었다. 그러나 박근빈은 여(戾)는 전의 허물을 뉘우치지 아니한다는 의미가 있다는 것을 내세워 고쳐줄 것을 청하였다.(『성종실록』 15년 10월 14일) 그러나 이성이 주색이 심하였고 고읍지(古邑之)를 때려죽이는 등 행적이 좋지 않으므로 고칠 수 없다는 대신들의 반대에 따라 성종은 박근빈의 청을 들어주지 않았다.(『성종실록』 15년 10월 14일)

한편 박근빈은 세조가 세상을 떠난 후에 머리를 깎고 자수궁에서 머물렀는데, 연산군은 술에 취하면 가무(歌舞)에 능한 박근빈을 불러서 춤을 추게 하였다. 이때 박근빈은 나이가 80세에 이르렀으므로 춤을 추기가 힘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연산군의 학대가 두려워 춤을 추었다.(『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10년 9월 4일)

묘소와 후손

박근빈의 무덤은 경기도 양주시 광사동에 조성되었으나, 지금은 경기도 김포시로 이장되어 있다.

박근빈은 세조와의 사이에서 2남을 낳았는데, 1자 덕원군이서는 좌찬성(左贊成)에 증직된 김종직(金宗直)의 딸인 임천군부인(林川郡夫人)경주 김씨(慶州金氏)와 결혼하여 사이에 2남을 두었다. 그리고 함안군(咸安君)윤말손(尹末孫)의 딸인 봉산군부인(鳳山郡夫人)함안 윤씨(咸安尹氏)와 재혼하여 사이에 4남을 두었고, 참지(參知)양일원(楊逸源)의 딸인 안성군부인(安城君夫人)청주 양씨(淸州楊氏)와 재혼하여 사이에 2남을, 성귀성(成貴性)의 딸인 창녕군부인(昌寧郡夫人)창녕 성씨(昌寧成氏)와 재혼하여 사이에 2남을 두었다. 덕원군은 1468년(예종 즉위년) <남이(南怡)의 옥사> 때 공훈을 세워 익대공신(翊戴功臣)에 책록되었다.(『예종실록(睿宗實錄)』 즉위년 10월 28일)

2자 창원군이성은 찬성(贊成)에 증직된 노호신(盧好愼)의 딸인 덕양군부인(德陽郡夫人)교하 노씨(交河盧氏)와 결혼하였는데, 교하 노씨와의 사이에 자녀를 두지 못하여 형인 덕원군과 임천군부인경주 김씨의 2자인 덕진군(德津君)이활(李濊)을 양자로 두었다. 그리고 좌찬성(左贊成)에 증직된 정익(鄭益)의 딸 광성군부인(光城郡夫人)광주 정씨(光州鄭氏)와 판관(判官)한찬우(韓儹禹)의 딸인 군부인(郡夫人) 청주 한씨(淸州韓氏)와 각각 재혼하였는데, 사이에 자식을 두지는 못하였다.

참고문헌

  • 『세조실록(世祖實錄)』
  • 『예종실록(睿宗實錄)』
  • 『성종실록(成宗實錄)』
  •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記略)』
  • 지두환, 『성종대왕과 친인척』, 역사문화,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