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평군 이의생(錦平君 李義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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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35년(세종17) = 미상]. 조선 전기 세종 때 활동한 왕자. 정종(定宗)이방과(李芳果)의 서출 15남 8녀 중에서 제 3왕자. 생전에는 원윤(元尹)이었으나 사후에 금평군(錦平君)에 추증되었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어머니 기숙의(奇淑儀)는 행주 기씨(幸州奇氏)기면(奇勉)의 딸인데, 공안부(恭安府) 궁인(宮人) 출신으로서 이름이 기자재(奇自在)라고 한다. 금평군은 기숙의가 낳은 4남 1녀 중에서 둘째아들인데, 동복형은 순평군(順平君)이군생(李群生)이고, 동복아우는 정석군(貞石君)이융생(李隆生), 무림군(茂林君)이선생(李善生)이고, 동복누이는 숙신옹주(淑愼翁主)였다.

세종 시대 활동

1422년(세종 4) 10월 원윤(元尹)이 되었다. 1425년(세종 7) 4월 의평군(義平君)이원생(李元生)과 순평군(順平君)이군생(李群生), 숙신옹주 부마 돈녕부 동첨지사김세민(金世敏), 함양옹주(咸陽翁主) 부마 돈녕부 동부지사박갱(朴賡) 등과 함께 사패(賜牌)를 위조하였다고 하여, 황해도 재령(載寧)으로 자원안치(自願安置)되었다가 6월에 석방되었다. 1427년(세종 9) 5월 기생 매소월(梅捎月)을 첩으로 삼고 그녀를 시켜서 기생들을 자기에게 소개하게 하여서 음란한 행위를 하다가, 발각되어 강화도에 유배되었다. 그때 기생 매소월을 곤장 80대를 때려, 자기 고을로 돌려보내어 고역(苦役)을 하도록 하였다. 1428년(세종 10) 유배에서 풀려났고, 그해 6월에 다시 원윤이 되었다. 1435년(세종 17) 11월 갑자기 돌아가자, 조회를 2일 동안 중지하고 관곽(棺槨)과 부의 물품을 내려 주었다.

묘소와 후손

시호는 효희(孝僖)이다. 묘소는 서울 북성산리(北城山里)에 있다고 하는데,[『선원보(璿源譜)』] 이곳은 현재의 서울시 서대문구 연희동이다. 1872년(고종 9) 금평군이의생과 함께 영종정경(領宗正卿)을 추증하고, 1879년(고종 16) 시호를 효희라고 정하였다. 부인은 남양 홍씨(南陽洪氏)홍숙(洪宿)의 딸인데, 후사가 없다. 서출 딸이 있는데, 최현손(崔顯孫)의 처이다. 1900년(고종 37) 수도군(守道君)이덕생(李德生)의 11대손 이달휘(李達徽)를 봉사손(奉祀孫)으로 삼았다.

참고문헌

  • 『세종실록(世宗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선원보(璿源譜)』
  •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紀略)』
  • 『행주 기씨 보략(幸州奇氏譜略)』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