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득(金丁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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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801년(순조 1) = ?]. 조선 후기 정조(正祖)~순조(純祖) 때의 천주교도로, <신유박해(辛酉迫害)> 순교자. 세례명은 베드로. 거주지는 충청도 홍주와공주이다.

정조~순조 시대 활동

‘대춘’이라고도 불렸던 김정득(金丁得)은 충청도 홍주의 대흥에서 태어나 친척이었던 김광옥(金廣玉)으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워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그런 가운데 1801년(순조 1) 어린 순조(純祖)를 대신하여 수렴청정을 하던 정순왕후(貞純王后)가 천주교를 사학(邪學)으로 규정하고, 천주교에 대한 금압령을 내리면서 천주교도들을 탄압하는 <신유박해(辛酉迫害)>가 시작되었다.(『순조실록(純祖實錄)』 1년 1월 10일) 이때 김정득은 김광옥과 함께 공주무성산(茂城山)에 숨었으나 곧 포졸들에게 발각되어 홍주 관아로 압송되었다.

이후 홍주 관아에서 천주교 배교를 강요받으며 고신을 당한 김정득은 김광옥과 함께 청주로 이송되었다가 또다시 한양으로 압송되었다.(『순조실록』1년 4월 23일) 그리고 같은 해 7월 13일 사형선고를 받았다.(『순조실록』1년 7월 13일) 당시 그에게는 “국가의 금지령을 두려워하지 않고 말하기를 제사란 폐할 수도 있다고 했다. 산골에 숨어 살며 어리석은 백성들을 속이고 얼빼내어 홀렸다. 고문을 가하며 신문해도 모질게도 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 죄상을 생각해 보면 만 번 죽어도 오히려 가볍다.”라며, 사형 선고가 내려졌다.[『사학징의』(邪學懲義)]

이후 그는 대흥으로 돌려보내졌고, 그 해 7월 17일 참수형을 받고 세상을 떠났다.

성품과 일화

김정득의 성품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알려졌다. 김정득은 친척인 김광옥과 함께 한양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후 다시 고향으로 내려올 때 그동안의 가혹한 심문과 형벌로 인하여 걸음조차 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즐거운 얼굴로 서로를 격려하였으며 헤어질 때 손을 마주잡으며, “내일 정오, 천국에서 만나세”라며 작별 인사를 하였다고 한다.[『하느님의 종 125위 약전』]

참고문헌

  • 『순조실록(純祖實錄)』
  • 『사학징의(邪學懲義)』
  • 이기경, 『벽위편(闢衛編)』
  • 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회사』상, 한국교회사연구소, 1980
  •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한국가톨릭대사전』2, 2006
  • 한국천주교 주교회의,『하느님의 종 125위 약전』,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