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화현(金化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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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김화 지방을 다스리던 관아. 조선시대 김화 지방을 다스리던 관청 및 행정기구.

개설

고려초기 김화는 삭방도(朔方道)에 편제되었다. 중기에 동주(東州)의 속현(屬縣)이 되었다가 후에 감무(監務)가 파견되었으며, 이러한 체제는 말엽까지 지속되었다. 조선초기에 8도제가 정비되면서 김화현(金化縣)이 되었고, 현감(縣監)이 파견되면서 주현(主縣)으로 승격되었다. 이러한 체제는 근대적 개편이 이루어지는 시기까지 지속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고구려에서는 부여군(夫如郡)이었고, 신라에서는 부평군(富平郡)으로 고쳤다.

고려 995년(고려 성종 14)에 10도제에서 삭방도로 편제되었다. 1018년(고려 현종 9)에 김화현으로 고치고 동주의 속현이 되었다. 1143년(고려 인종 21)에 감무를 두었고, 1172년(고려 명종 2)에 평강감무를 겸임하였다.

조선 1413년(태종 13)에 8도제가 정비되면서 김화현이 되었고, 현감이 파견되어 주현으로 승격되었다. 1455년(세조 1)에 군익도(軍翼道) 체제에 따라 회양도(淮陽道)를 설치하고, 원주는 중익(中翼)으로, 김화는 좌익(左翼)으로 편제하였다(『세조실록』 1년 9월 11일). 1457년(세조 3)에 군익도 즉 3익(三翼) 체제를 폐지하고 거진(巨鎭)을 설치하는 진관(鎭管) 체제에서 김화는 회양진(淮陽鎭)에 귀속되었다(『세조실록』 3년 10월 20일). 또한 1692년(숙종 18)에 회양진 소속을 철원영장(鐵原營將)으로 이속시켰다. 1644년(인조 22)에 낭천현을 폐지하여 김화현에 합병하였다가 1653년(효종 4)에 분리하였다.

조직 및 역할

조선초기에는 현감과 훈도(訓導) 각 1인을 배치하였다. 현감은 6품 음관(蔭官)직이었다. 수령의 예하에 향청(鄕廳)을 두고 좌수(座首) 1인과 별감(別監) 2인을 배치하였다. 6방(六房) 관속의 규모는 후대에 이르면서 늘어난 것으로 보이며, 『여지도서(輿地圖書)』에서는 군관(軍官) 40인, 아전(衙前) 20인, 지인(知印) 15인을 두었다. 그리고 사령(使令)·군뢰(軍牢)·관노(官奴)를 포함하여 40명, 관비(官婢) 21명을 두었다. 6방 관속은 화강관(花江館), 낙민헌(樂民軒), 절애당(節愛堂), 호천당(壺天堂), 향청, 작청(作廳), 훈련청(訓練廳), 무비고(武備庫) 등 관아에 배속되어 업무를 분장하였다.

변천

1895년(고종 32)에 지방 행정체제의 개편에 따라 8도제를 폐지하고 23부제를 시행하면서 강원도는 춘천부와 강릉부로 분할되었으며, 그간의 군현제는 군제로 일원화되었다. 이때 김화는 김화군이 되었고, 춘천부에 귀속되었다. 1896년(고종 33)에 23부제를 폐지하고 13도제를 시행하면서 춘천부와 강릉부는 통합하여 강원도가 되었고, 이때 김화군은 강원도에 귀속되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관북읍지(關北邑誌)』
  • 『관동지(關東誌)』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강원도, 『강원도사』11, 강원도사 편찬위원회,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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