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식원(禮式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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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시기에 황실의 대외 교섭 관련 사무를 담당하던 궁내부 산하 기구.

개설

예식원은 1900년(광무 4) 12월 황실의 대외 교섭 관련 예식과 친서(親書)·국서(國書)·외국 문서의 번역 사무 등을 담당하기 위해 설치한 기구이다. 궁내부 외사과(外事課), 번역과(繙譯課)의 기능을 계승했다. 예식원 설치 이후 고종은 외부를 거치지 않고 외교 업무를 처리할 수 있게 되었다. 업무의 중복이 있더라도 중요한 부서는 황실 내에 만들어 직접 장악하는 것이 대한제국의 정치 형태였다. 탁지부 기능을 내장원이, 군부 기능을 원수부가, 경무청 기능을 경위원이 가져왔다고 한다면, 외부 기능 중 일부는 수민원(綏民院)과 예식원이 가져왔던 것이다. 광무개혁 때 예식원의 위상은 확대되어 갔고, 1904년 이후에도 일정 기간 유지되었다. 그러나 1906년 8월 결국 폐지되고, 관련 업무는 장예원(掌禮院)으로 넘어갔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예식원은 외부를 거치지 않고 황제가 직접 외교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설치한 부서이다. 본래 외교 업무는 외부에서 담당하였으나 고종은 황제 직속 기구로 예식원을 만들어 중요 외교 업무는 직접 처리하였다. 이처럼 고종은 중요 업무의 경우 다른 부서와 겹치더라도 황제 직속 기구에서 직접 담당하도록 하였는데, 예식원 외에 내장원, 원수부, 경위원 등이 그러했다(『고종실록』 41년 7월 15일).

조직 및 역할

예식원은 1900년 12월 16일 궁내부 관제 개정에서 황실의 대외 교섭 등을 담당할 기구로 출범하였다. 칙임관인 장(長) 1인, 부장(副長) 1인, 주임관인 외무과장 1인, 번역과장 1인, 참리관(參理官) 6인, 번역관 3인, 판임관인 주사 5인, 번역관보 5인으로 구성되었다. 예식원장으로 오랫동안 임명된 사람은 민영환이었다. 그는 1904년 2월 20일까지 3년 3개월간 예식원장을 겸직하였다. 민영환은 1902년 11월부터 1년여 동안 여권 업무를 담당하는 수민원 총재를 맡기도 했는데, 그때에도 외부와의 업무 중복으로 마찰을 빚었다. 한편 예식원은 대외 교섭 외에 고종 즉위 40주년 행사 등 궁중 내부의 각종 의식에도 비서원 등과 함께 관여하였다. 그 밖에 고려 왕릉 침범 사건, 양자 선정 문제, 사고(史庫) 훼손 문제, 추증 문제 등에 관한 상소도 예식원에서 처리하였다.

변천

광무개혁 때 예식원의 위상은 확대되어 갔고, 그러한 경향은 1904년 이후에도 일정 기간 동안 유지되었다. 1904년 1월 황실 측근 기구에 대한 비판 여론으로 수륜원, 평식원, 관리서(管理署) 등의 기구가 폐지될 때에도 예식원은 오히려 박문원(博文院)을 흡수하여 규모를 늘렸다. 1905년 3월 관제 개정 때는 황실의 의식, 제사, 예의 절차뿐만 아니라 음악에 관한 사무도 관리한다고 규정되었으며, 주사가 26명에 달할 정도로 규모가 컸다. 그러나 1906년 8월 결국 예식원은 폐지되어 예식과(禮式課)가 되었으며 황실의 제사 의식, 예식, 음악 사무 등은 장예원에서 맡게 되었다.

참고문헌

  • 『한말근대법령자료집(韓末近代法令資料集)』
  • 오연숙, 「대한제국기 고위관료층 연구: 의정부와 궁내부의 칙임관을 중심으로」, 단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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